▲ 박용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의회신문】'조선어학회 사건' 으로 탄압을 받은 조선어학회의 항일투사들은 해방 이후 새나라 건설 작업에 참여하였다. 항일 투사들은 통일 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고,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일부 항일투사들은 해방 이후 분단 정권의 수립을 거부하고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좌우 합작운동과 남북 협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대다수의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입장을 유지하며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해방 이후 조선어학회의 정치 지형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33명 가운데 4명을 제외하면, 좌우합작 노선의 인사(6명), 합리적 보수 인사(22명), 극우 인사(1명)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선어학회 인사의 대다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사례를 들어보자. 이인은 4·19혁명 때에 시위학생들을 1000여명이나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고, 이승만의 하야와 체포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냈다. 김양수는 이승만 정권이 제출한 신국가보안법의 제정을 반대하였다. 윤병호도 이승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하였다. 서민호도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다가, 정치보복을 당하였다. 또 남북 교류를 주장한 것이 문제가 되어, 박정희 정권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두 차례 투옥되었다. 그의 선구적인 남북 교류론은 김대중이 계승하여 결실을 맺었다

김윤경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3·15 부정 선거를 신랄히 비판하여 4·19혁명에 불을 붙였다. 김도연과 김윤경은 박정희 정권의 졸속한 한일협정 체결을 반대하였다.

신현모는 해방 뒤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당무부장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시절에, 국회의원이 받는 보수인 세비를 제외하고 일체의 수당과 거마비조의 돈을 받지 않았다. 종래에 받던 3만환 보수를 세비와 수당을 합해 7만환으로 올린 결의안을 국회가 통과시켰는데, 그는 여기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수당과 거마비조의 돈을 받지 않고 국회에 되돌려주었다.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 공직에 나가지 않았다. 충무공기념사업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1958년 이기붕이 자신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도와달라고 하면서, 비서를 시켜 돈 10만환을 보내왔다. 신현모는 돈을 되돌려주고 이기붕의 선거운동을 거절하였다.

이처럼 신현모는 이승만 독재 정권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추진하고 있을 때, 3선 개헌을 지지하는 제헌 국회의원들이 성명서를 만들어 도장을 받으러 다녔는데, 그는 끝까지 거절하였다. 당시 생존한 제헌 국회의원 94명 가운데 그를 포함하여 6명만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1975년 1월29일에 서거하였다. 그는 한평생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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