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기획칼럼 - 광야의 진혼곡

▲ 정행산 주필
【의회신문=정행산 주필】광복 70년을 맞아 정부는 일제 강점기 만주와 러시아 극동지역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가운데 해외에 거주 중인 가족들을 초청, 특별 귀화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다. 이들 가운데 러시아 국적으로 모스크바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거주 중인 옐레나(54세. 의사)와 동생 갈리나(52세. 의사) 자매는 일제 강점기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의 산악지대에서 ‘백마(白馬)를 타고 일제 군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김일성 장군’, 곧 김경천(金擎天) 장군의 손녀들이다.

◇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든 남만삼천(南滿三天)

3.1운동 후 1920년대 초에 만주와 소련 령 연해주 등지에서 ‘김일성(金一成)’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6~7명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김경천(金擎天. 1887-1942)은 본명이 김광서(金光瑞)이며,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나 1911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기병과를 23기로 졸업했다. 그는 도쿄 기병 제1연대 중위로 근무하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투쟁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6월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지대형(池大亨. 훗날 광복군 사령관)과 함께 일군에서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한다.

김광서와 지대형은 요녕성 고산자(遼寧省 孤山子)에 있는 조선인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이 되었다. 그곳에서 이들은 교관으로 있던 신팔균(申八均)과 함께 세 사람이 천(天)자 돌림의 별호를 갖기로 하고 신팔균은 신동천(申東天), 김광서는 김경천(金擎天), 지대형은 지청천(池靑天)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들을 조선독립투쟁사에서 남만삼천(南滿三天)이라고 부른다.

1919년 11월 김경천은 소련령 연해주로 넘어갔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서 10월 혁명(1917년)이 일어나고 적(赤)?백(白) 내전이 치열해지자 연해주지역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고 볼셰비키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했다.

일본은 공산혁명을 반대하고 차르(러시아 황제)를 지지하는 러시아 백군(白軍?반혁명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2개 사단 7만3천 명의 대군을 출병, 연해주지역의 조선독립군 단체들과 항일지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던 김경천은 일본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삼림지대인 수청(스챤)지역으로 이동, 그곳에서 김일성(金一星)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약 1천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 항일의병 ‘고려의병대’를 조직했다. 김경천의 고려의병대는 볼셰비키 적군(赤軍?공산군, 일명 홍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러시아 백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김경천의 활약상이 당시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등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면서 그 이전부터 회자되던 ‘김일성 장군의 전설’은 더욱 증폭되었다. 당시 ‘전설의 조선독립운동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이름은 일본군에게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으며, 조선인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영웅’이자 ‘희망’이었다.

김광서, 곧 김경천은 국내 신문기자와 인터뷰도 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소련 붉은 군대와 손잡고 시베리아의 일본군을 격퇴한 다음 소련 적군(赤軍)의 후원으로 국내에 진공, 조선주둔 일본군과 각급 일본기관을 조선 땅에서 몰아낼 계획임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 소련군 사령관 직 거절, 반동분자 낙인

1922년 가을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수하자 이 지역을 장악한 볼셰비키(러시아혁명세력)는 동맹관계였던 김경천의 조선인 독립군부대에 대해 붉은 군대(소련군)에 편입할 것을 요구하며 김경천에게는 장성급 사령관 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김경천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수천 명의 고려의병대 대원들도 하나같이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조선독립군이다. 우리가 소련정권을 위해 목숨 내걸고 풍찬노숙하며 투쟁했는가? 해산 당할지언정 조국을 버리고 소련군이 될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 고려의병대는 강제로 무장해제당해 와해되고 말았다.

불패의 전략가로 널리 알려진 ‘김일성 장군’ 김경천의 말년은 쓸쓸하고 비참했다. 소련공산당 입당을 강요한 스탈린 정권의 회유를 끝내 거부한 김경천은 일부 대원들과 함께 소?만 국경지역으로 이동해 협동농장을 일궈 경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1937년 11월)당하기 직전인 1936년 가을 소련공산당 입당을 끝내 거절해 반동분자로 감시를 당하던 김경천은 소련 비밀경찰에 간첩죄로 체포되어 2년 반의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 사이 그의 아내 유정화와 장녀 김지리, 차녀 김지란, 막내딸 김지희(지나 또는 지혜), 외아들 김기범 등 가족은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나라 잃은 백성, 힘없고 가난한 약소민족의 삶은 어디에서나 늘 고달프고 서러웠다. 일제의 온갖 수탈과 박해, 그리고 천형(天刑)같은 가난을 견디다 못해 대대로 뿌리내리며 살던 고향을 버리고 어린 자식들의 손을 이끌어 남부여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찾아간 낯선 땅에서조차 이들은 짐승의 무리처럼 내몰려야 했다.

김경천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가족을 찾아 카자흐스탄으로 갔으나 1939년 다시 간첩죄로 체포돼 8년형을 선고받고 소련 북부 노동수용소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1942년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사망 일자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1998년 김경천은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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