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수권정당으로 가려면 당의 기본적 방향 정상화해야"
문재인 "정체성 논쟁 관념적이고 부질없어, 스펙트럼 넓혀야"

▲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24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공천장 수여식에 참석해 이종걸 원내대표, 진영 후보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의회신문=정행산 주필】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는 자신의 비례대표 공천안이 비상대책위와 중앙위원회에서 뒤집히자 대표직 사퇴까지 불사할 듯했지만, 결국 하루 만에 친노 주류의 공천안을 수용하고 주저앉았다. 자신이 물러나면 이번 선거의 시대정신인 ‘낡은 진보패권의 청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민주가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일부 세력의 정체성 논쟁을 해결하지 않으면 수권정당으로 가는 길이 요원하다. 미래의 정권을 지향한다면 기본적으로 국민의 정체성에 당이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 당에 남아서 당의 기본적 방향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 김 대표의 대표직 사퇴 번복의 변(辨)이다.

김 대표가 말한 '정체성' 이란 뿌리 깊은 친노 운동권 체질을 의미한다. 정확한 진단이고 핵심을 찌른 처방임에는 틀림이 없다. 김 대표는 지난 1월 "친노 패권주의가 당에 얼마만큼 깊이 뿌리박고 있는지를 보겠다. 이것을 수습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다"고 했지만 그가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 "낡은 진보패권 청산은 시대정신"

김 대표가 더민주의 비상대책위 대표로 올 때 내세운 명분은 '친노 패권주의를 청산하고 운동권당(黨) 체질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종인 대표는 일부 친노·운동권 의원을 쳐냈고, 햇볕정책 수정론과 노조 개혁론을 제기하며 더민주당이 달라질 듯한 발언을 했다. 야당이 바뀌기를 기대했던 국민은 김 대표를 주목했고 당 지지율도 올랐다.

그러나 김 대표는 친노·운동권의 벽 앞에서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은 제1 야당에서 진보 패권주의와 낡은 진보를 청산하는 데에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저항이 버티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김 대표의 중도·실용 공천개혁에 반격하지 않던 진보 패권세력은 공천이 마무리되자 대거 공세에 나섰다. 문재인 대표 시절 운용됐던 혁신위, 친노 성향의 당내 을지로위원회, 외곽에서 당을 지원하는 원로원탁회의의 주요 인사들이 김 대표를 물어뜯고 나섰다.

정봉주 전 의원과 강금실 전 장관 같은 외곽 그룹도 가세했다. 노무현 정부 때 법무장관을 지낸 강금실 씨는 김 대표에게 끌려가는 더민주당을 향해 "미치려면 곱게 미쳐라"고 했다. 민정당 출신의 보수정객 김종인 대표가 굴러 들어와서 친노·운동권을 잘라내고 ‘북한 궤멸론’을 말하는 것을 보니 당이 "미쳤다"는 것이다.

▲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국회를 나서고 있다.
◇ 총선 끝나면 김종인 개혁 변방으로

총선 후 새 지도부 선출과 대선후보 경쟁국면이 시작되면 이런 저항은 그야말로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약 500명의 중앙위원회, 대의원·핵심당원 그룹은 여전히 진보 패권주의의 공고한 울타리 안에 있다. 이들이 총선 후 세를 다시 가동하면 김종인의 개혁은 변방으로 밀려날 공산이 크다.

김 대표는 지금까지 일부 친노 중진과 막말·갑질·강경파 몇 명을 정리했을 뿐 '좌파 패권주의'는 해결하지 못했다. 짜르(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당 내에서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김 대표이지만 친노·운동권의 벽을 돌파하기엔 역부족인 것이다. 더민주의 주류로 자리 잡은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좌파 운동권 세력은 그만큼 뿌리 깊고 강고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총선이 끝나면 김종인 대표는 문 전 대표의 얼굴마담이나 조력자에 그칠 수밖에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벌써 파다하다. 여전히 더민주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친노⋅운동권 골수파들이 김 대표의 야당 변신 드라마를 가만히 앉아서 바라만보고 있을 리도 없고, 그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조짐은 벌써부터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 대표의 비례대표 공천안을 뒤집은 당 중앙위원회 반란이었다. 친노⋅좌파 운동권 주류가 잠시 고개를 숙였을 뿐 때가 되면 언제든 다시 들고일어나 집단패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과시한 셈이다. 이번 김종인 파동에서 분명해진 건 김 대표의 정치실험이 낡은 진보패권 세력에 의해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이다.

경남 양산에 머물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천이 끝나자 선거 지원에 본격 나섰다. 당 대표를 사퇴한지 두 달 만에 돌아온 문 전 대표는 지난 24일 서울 마포을 손혜원 더민주 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 "요즘 우리 당 정체성 논쟁은 관념적이고 부질없는 논쟁" 이라며 "진보세력과 민주화운동세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쪽 면만 본 것"이라고 했다.

"수권정당으로 가려면 일부 세력의 정체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던 김종인 대표의 전날 발언과는 다른 주장을 한 것이다. 당이 기사회생하고 공천도 끝나자 이제 서서히 김 대표를 옥죄고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 서울 마포을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후보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이 열린 24일 오후 문재인 전 대표가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좌파운동권식 투쟁 폐해 국정 위협

제1 야당의 노선 개혁이 중요한 것은 낡은 좌파운동권식 투쟁의 폐해가 국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좌파패권 문화는 자기들만이 정의를 독점하는 듯한 독선, 이념 과잉의 비현실적인 정책노선, 세상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는 진영논리, 상식의 세계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극단적 언행,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공격적인 성향 등으로 축약된다. 이런 좌파패권 문화가 지난 4년간 19대 국회를 망치고 나라의 전진을 가로막은 주범으로 인식됐다.

지금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야는 지금껏 숨겨온 공천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더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국가와 공공의 이익보다 계파의 이해관계, 당(黨)보다는 계파를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움직임의 한복판에서 온갖 공천 파행을 일으켜온 세력이 바로 여당의 친박과 I당의 친노(親盧)⋅좌파운동권이다. 누군가를 절대군주처럼 떠받들고 맹목(盲目)에 가까운 충성을 강요하는 문화는 다름 아닌 좌파 패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친노·좌파운동권은 한때 스스로 더는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폐족(廢族)이라고 선언했던 세력이다. 그러나 친노와 좌파운동권은 단 한 번도 야당의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 적이 없다. 그들은 곱지 않은 세상의 눈길에 더하여 멸문(滅門)의 위기에 몰리자 김종인 대표를 구원투수로 내세웠다. 그러나 김 대표가 비례대표 공천에서 친노·운동권을 밀어내자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그 어떤 공적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친박과 친노는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런 이 두 계파가 이번 총선뿐만 아니라 지난 10년 가까이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해 왔다. 이들이 뿌린 이 노골적이고 원시적인 감정의 씨앗들은 총선 이후(以後) 더 큰 재앙으로 자라날 것이다. 낡은 진보패권의 청산이 절실한 시대정신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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