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구제 개혁이 DJ정신이다 ①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9주기에 부쳐

주) 8월 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9주기이다. DJ의 업적과 유지를 기리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16일 여야 5당 원내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비례성과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강력하게 지지한다.”며 “권역별 정당명부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또 “어느 누구보다 일찍부터 비례성과 대표성을 강화하는 선거제도 개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해왔고, 2012년 대선과 지난 대선 때 이미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공약했다. 

지난 번 개헌안 속에도 그 내용을 담은 바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서 “마침 19대 국회 때는 중앙선관위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국회에 제시를 한 바 있었다.”는 사실도 상기시켰다. 당시 중앙선관위 안은 지역구 200명 대 비례대표 100명이고, 비례대표를 권역별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동형 방식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김대중으로부터 시작해 노무현, 문재인 등 민주정부 대통령들이 일관되게 추진한 정치개혁과제이다. 

“정치인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A politician thinks of the next election. A statesman, of the next generation).” 19세기 미국 신학자이자 정치개혁가였던 제임스 프리먼 클라크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바로 DJ를 두고 하는 말이다. DJ 하면 가장 떠오르는 단어가 ‘IMF외환위기 극복’이지만 사실 ‘정치개혁을 향한 집요한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른바 동진정책으로 불린 영남 공략은 DJ가 추진한 정치개혁의 일환이었다.

OECD 가입국 가운데 현재 우리 대한민국보다 1인당 GDP가 높으면서 ‘연동형 방식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은 나라는 미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미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일본은 상·하원 양원제를 채택함으로써 소선거구제를 보완하고 있다.

독일식 연동형 방식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논의가 여의도 정치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6대 총선을 앞둔 1999년 정기국회 때이다. 1998년 12월부터 지루하게 진행한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여야는 이 의제를 3당(국민회의-자민련, 한나라당) 3역(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의장) 회담으로 넘겼다. 당시 여당 지도부를 보면 국민회의는 김대중 총재(대통령)-이만섭 총재권한대행, 자민련은 김종필 명예총재(총리)-박태준 총재 체제이고,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회창 총재였다. 

한편 실무협상에 참여한 각 정당 사무총장은 한화갑(국민회의)-김현욱(자민련)-하순봉(한나라당) 의원이고, 원내총무는 박상천(국민회의)-이긍규(자민련)-이부영(한나라당) 의원이다. 그리고 정책위의장은 임채정(국민회의)-차수명(자민련)-정창화(한나라당) 의원이다.

국민회의 협상팀은 DJ 측근들로 짜인 최강이었다. 한화갑 사무총장은 대학시절 자원봉사로 출발해 30년 이상 DJ 곁에서 선거현장을 누빈 자타 공인 전략가로 정권교체 뒤 첫 여당 원내총무를 맡아 여소야대 정국을 여대야소로 바꾸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박상천 원내총무는 논리가 정연한 검사 출신으로 야당 총무 시절 이미 3년 가까이 뛰어난 협상력과 추진력을 보여준 바탕으로 법무장관 퇴임 두 달 만에 1999년 7월 두 번째 직선총무에 선출된 선거법 전문가였다. 임채정 정책위의장은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된 전직 언론인이며 재야운동에 투신해 민통련 상임위원장을 지낸 원칙주의자였다. 국회 정치개혁특위 위원장을 맡으며 유연함이 더해졌고 옛 민통련 동지인 이부영 한나라당 원내총무와 친분을 바탕으로 많은 역할을 요구 받았다.

그러나 공동여당인 자민련 협상팀은 JP 직계가 없는 독특한 구성이었다. 김현욱 사무총장은 11~13대 민정당 의원(충남 당진)을 거쳐 15대 자민련 공천으로 4선에 성공했다. 그는 서상목 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1999년 4·7파동으로 경질된 박준병 사무총장 대신에 임명됐으나 자민련 창당 주역은 아니었다. 이긍규 원내총무는 13대 민정당으로 충남 서산에서 첫 당선됐고 1995년 자민련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해 이듬해 3선에 성공한다. 그는 직전 총무 강창희 의원이 내각제 연내 개헌 유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취임 불과 3개월 만에 사퇴한 후 1999년 8월 선출됐다. 

1999년 7월 21일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3자는 “연내 내각제 개헌을 유보하며 국민회의-자민련 간 합당은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당초 DJP연합 합의문에는 19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국 과학기술부장관 직까지 사임하고 당에 복귀해 내각제 추진에 총력을 기울여온 강창희 원내총무가 책임져야 했다. 상공부 관료 출신인 차수명 정책위의장은 특허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감하고 13대 민정당 공천으로 울산남구에 출마, 낙선했다. 14대 국민당, 15대 신한국당으로 당선 후 1998년 10월 자민련 입당과 함께 정책위의장에 임명된다.

이와 반면 야당인 한나라당은 16대 총선을 겨냥한 이회창 총재 친정 체제였다. 1999년 8월 당직개편에서 임명된 하순봉 총장은 신경식 전 총장과 마찬가지로 총재비서실장에서 자리를 옮긴 경우이다. 이부영 원내총무는 1999년 1월 이회창 총재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이재오 의원을 70 대 37로 꺾고 선출된 당내 강경파였다. 그나마 TK출신 민정계 4선 정창화 정책위의장이 비주류를 대변하는 정도이다.

최광웅(데이터정치경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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