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구제 개혁이 DJ정신이다 ②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9주기에 부쳐

주) 8월 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9주기이다. DJ의 업적과 유지를 기리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정치권에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본격 논의하기 시작한 건 1998년 DJ 당선 직후였다. IMF 외환위기를 거친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는 의원정수를 250명 선으로 줄이되,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1 대 1로 하는 매우 혁명적인 당론을 채택했다. 전국정당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김대중 대통령의 강력한 주문에 따라 소선거구와 6개 권역별 비례대표의원을 선출하는 일본식 병립형이었다. 즉 처음에는 독일식 연동형이 아니었다. 그 후 국민회의-자민련의 공동여당 협상안은 7대 도시에 한해 2~4인(기본 3인) 중선거구를 도입하는 도농복합선거구와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바뀌는데, 정당 지지율이 한 자리에 불과한 자민련을 위한 일종의 당리당략이었다. 1999년 3당 3역 회담을 거치며 국민회의는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2 대 1로 변경했고 한나라당은 전국 지역구 소선거구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및 정당명부식투표 등 훨씬 더 개혁적인 사실상 독일식 안을 역 제안했다. 그러나 끝까지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한 JP측 자민련의 거부로 2000년 2월 협상은 최종 결렬됐다.

한편 1인 2표 정당명부식투표는 2000년 2월 민주당 유재건·조순형 의원과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전국구제도 등을 규정하고 있는 공직선거법 관련규정에 대한 헌법소원을 내고 이듬해 7월 승소하면서 도입됐다. 당시 이양희 사무총장과 이완구 원내총무 등 자민련 당직자들은 “헌법재판소 결정을 존중해야 하지만 수긍하기 힘든 면이 많다. 1인 1표제의 경우 다수 선진국에서 채택하고 있으며 우리의 선거제도와 투표 행태 등 정치현실에 부합된다고 판단해 도입한 제도다.”라고 유감을 표시했다. 이처럼 1인 2표제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이었던 건 1인 1표제가 그나마 지명도가 높은 전·현직 의원을 꽤 보유하고 있는 자민련이 전국구 의석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들 말처럼 2002년 지방선거 광역의원 비례대표 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1인 2표 정당명부투표에서 자민련 득표율은 원외 민주노동당(8.13%)보다 못한 4위(6.51%)를 기록하는 참패를 당했다. 한나라당(52.15%)과 민주당(29.10%)이 각각 1, 2위였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 전국구 배분은 변함없이 지역구 출마자 1인 1표 득표수 합산으로 배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공동여당은 수도권과 충청권 등 대부분 지역에 후보를 내고 서로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엉뚱하게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얻는 모양새로 민주당보다 18석 많은 1위, 133석을 차지했다. 득표율도 다소 격차가 줄어든 한나라당(38.96%), 민주당(35.87%), 자민련(9.84%) 등 순이었다. 그런데 자민련은 단 17석에 그치고 충청권 지역정당으로 위축되면서 독자적인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득표수도 4년 전 대비 무려 132만표가 줄어든 186만표에 그쳤다. 정당명부제 도입에 합의하고 새천년민주당과 많은 지역에서 연합공천을 했더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사태였다. JP의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 셈이다. 새천년민주당 역시 밀라노프로젝트와 같은 대대적인 예산투입, 김중권 비서실장과 같은 인사 우대 등 물량공세로 총력을 기울였지만 영남 65개 지역구에서 무려 70만 5천표를 얻고도 단 1석을 건지지 못했다. 심지어 경북봉화·울진에서 출마한 김중권 후보는 겨우 19표 차이로 석패하였다. 결국 DJ의 동진정책은 민심과 동떨어진 선거제도 개혁이 핵심이었다.

 

최광웅(데이터정치경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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