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식 의정활동, 준엄하게 감시해야

실세 김기춘은 왜 ‘바둑법’에 집착했을까

박근혜 정부의 최고 실세였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경남 거제시에서 1996년에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된 이후 내리 3선 국회의원으로 재직했습니다.

검사 출신으로서, 검찰총장을 거쳐, 법무부장관직을 수행했고, 제15대, 제16대, 제17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2003년 4월부터 2004년 5월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직도 맡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4년 간 숨고르기를 하다가, 2013년 8월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정관계 핵심 코어로 등극하게 됩니다.

워낙에 얽힌 스토리가 많은 분이라, 의정활동은 더 특별할 것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김기춘, 이 분이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먹으면서 장장 12년간 의정활동을 했는데, 대표발의한 법률이 단 2건에 불과합니다.

물론 법안 많이 발의한다고 곧바로 훌륭한 의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건만 성실히 사회적 의제를 발굴하고 공론화 하더라도 일 년에 12건은 되어야 최소한 일하는 시늉은 했구나 할 수 있을텐데요. 이 분은 12년 동안 단 2건만 입법실적을 올린 것입니다. 그 2건도 본회의에서 통과된 것은 아니고, 임기만료로 폐기되었습니다.

김기춘 의원이 발의한 2건의 법안 중 하나는,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의 대통령후보가 테러 등을 당해 사망하는 경우에 대타 후보자를 내세울 때까지 대통령선거일을 조금 미루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2006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커터칼 테러로부터 기인한 우려를 반영한 법안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김기춘 전 의원이 발의한 또 한 가지 법안이 있는데, 바로 ‘저작권법’ 개정안입니다. 공안형사분야에서 주로 활동해온 김기춘 전 의원이 저작권 문제에 관심을 두다니 신통방통할 일인데요. 내용을 보면 딱 다섯 글자로 확인됩니다. ‘기.보.저.작.물’.

저작권법에 ‘기보저작물’이라는 다섯 글자를 명시하는 내용의 개정안인 겁니다. 기보는 바둑기사들이 둔 바둑결과표, 바둑상황판이라고 할 수 있죠. 이걸 여러 신문사나 잡지 등에서 가져다가 쓰곤 하니까, 함부로 쓰지 마라, 저작권료 내고 게제하라는 취지로, 저작권법 상의 보호대상으로 명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김기춘 전 의원이 내세운 저작권법 개정안의 제안취지는 상당히 근사합니다.

 

바둑 대국의 기록물인 기보는 대국자의 사상과 감정이 창작적으로 표현된 저작물에 해당하고, 프로기사의 기보는 가치 있는 저작물로서 많은 대중이 연구하고 감상하는 저작물임.

현재 케이블 TV나 위성방송의 바둑 프로그램, 인터넷 등의 매체를 통하여 기보를 이용한 서비스의 상업적 이용이 증가하고 있으나 기보 이용에 관한 저작권이 확보되지 않아 저작자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는 실정임. 특히 일부 인터넷 사업자는 기보가 대국자의 우발적 착수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는 근거로 기보의 저작물성을 부인하면서 기보를 무단으로 이용하고 있음.

이에 현행법 저작물의 예시 조항에 바둑 기보를 명시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바둑 기보가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임을 분명히 하여 프로기사 등의 바둑 기보에 관한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임(안 제4조제1항제8호).

 

몇 해 전에 드라마 미생을 통해서 바둑이 대중들에게 더욱 친근한 여가 문화로 다가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세돌 기사와 인공지능 기사 간의 대국도 큰 주목을 끌었습니다. 바둑에 인생의 지혜를 담은 해설서를 읽기라도 할라치면 그 매력은 더욱 배가 됩니다. 요즘에 워낙 현란한 입체 게임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바둑의 설 자리가 매우 좁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클래식 게임으로서의 바둑의 매력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기원, 대한바둑협회 등 바둑계 임원을 맡기도 했던 김기춘 전 의원의 바둑 사랑은 유별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느 고급차 광고 카피처럼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품위에 맞는 레포츠였기 때문이었을까요.

한편, 저작권법 개정안에 대한 로비 활동을 바둑계도 굳이 숨기지 않는 눈치입니다. 바둑계의 수익이 달린 주차대한 숙원과제라고 할 수 있겠죠.

김기춘 전 의원의 탄탄한 정치활동 이면에 바둑계 임원진들의 지지와 후원도 상당했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눈에 띄는 것은 바둑계 임원들이 비단 ‘순수 바둑인’들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대부분 경제계 수장들이거나 정관계 인사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국민에게 그저 순수한 전통문화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과 달리, '바둑'을 매개로, 거대한 정재계 인맥의 정무적 연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어쨌든, 김기춘의 바둑 사랑은, 국민의 사랑을 받던 조훈현 9단이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제20대 국회에 진출하는 양상으로 이어집니다. 조훈현 의원은 20대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기보저작물이라는 다섯 글자에 그치지 않고, 아예 ‘바둑진흥법’을 ‘제정안’ 형태로 만들어 대표발의하기에 이릅니다. 바둑진흥법은 마침내 국회를 통과하여 지난 4월 17일 공포되고 오는 10월 18일부터 시행되게 됩니다. 핵심 내용은 바둑에 대한 창업 촉진, 바둑 연구기관이나 바둑단체에 대한 필요 자금 지원, 국제대회 개최 등의 위탁 또는 대행 기관에 대한 필요 경비 전부 또는 일부 지원 등입니다. 

참고로, 비례대표제에 직능적 안배를 정무적으로 하고는 있지만, 엄연히 비례대표제와 직능대표제는 다른 제도입니다. 직능대표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이 특정 직업이나 특정 그룹의 이익을 직설적으로 대변하는 입법활동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학계의 지적들이 다수입니다. 

의원에게는 어떤 정책에 대한 법제화를 의지에 따라 설계할 자유 즉, '입법재량권', '입법선택의 자유'가 부여되어 있지만, 특정직역에 대한 전문성이 그 분야의 이익 보장을 위해서 쓰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쨌든, 바둑을 사랑하는 국민적 정서가 있는 한, 점점 줄고있는 바둑인구 흐름에도 불구하고 바둑의 세계화를 도모하기 위한 바둑진흥법이던 바둑발전특별법이던 백 번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바둑은 바둑일뿐, 누군가의 정치적 수단, 어떤 이들의 지나친 정치적 연대와 유착 수단으로 오남용되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기호, 자신의 여가생활, 지신의 사생활, 자신의 욕망, 자신과의 친분에 의해 이뤄지는 입법활동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속된 말로 ‘이 따위로’ 의정 활동, 입법 활동을 할라치면, 국회의원을 더 늘린다한들 기대할 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보저작물이라는 다섯 글자를 남긴 김기춘 전 의원의 입법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한 인물이 남긴 흔적, 유별나게 집착했던 단 하나의 화두를 보면서, 참 표현하기 무엇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입법과 민생현장] ‘다시보는 의원 입법’ 취재.

남영지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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