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창간 7주년 기념 특집기획 ‘정치 70년 비화’
‘이승만 정권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이 날 한강철교 폭파 당시 엄청난 재산피해와 천 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수장됐다.

▲ 서진모 수석논설위원
【의회신문=서진모 수석논설위원】북한군이 침공한 지 3일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경, 한강의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되었다.

당시 한강에는 5개의 교량(이촌동-노량진간의 한강대교와 3개의 철교, 광나루의 광진교)이 있었으며, 수도권 내에서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모두 이 교량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북한군의 한강 이남으로의 공격을 막으려면 한강교의 폭파가 필수적인 조치였다. 문제는 그 시기인데, 한강교의 폭파는 그 시기의 잘못으로 피해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정부는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큰소리 쳤으나,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한 채병덕 육군총참모총장은 6월 26일 의정부 전선이 붕괴하여 창동선으로 후퇴할 무렵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불러 1사단 공병이 임진강교 폭파에 실패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필요시에 “한강교 폭파는 자신이 있는가?”하고 따져 물었다. 이때부터 한강교 폭파계획과 준비가 시작되었다.

공병감은 전세가 호전되어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다이나마이트 뇌관과 도화선을 거두어 대기하도록 폭파조에 지시하기도 했다.

▲위 사진 가운데는 정일권 장군(훗날 국무총리)과 한국전쟁에 영웅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맥아더 원수.
그러나 미아리 방어선에 적의 공격이 심해지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27일 밤 다시 폭파준비를 명령하고, 28일 새벽 1시 45분경 돈암동에서 돌아온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의 전차가 시내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리고, 그 길로 장경근 국방부 차관과 함께 육본을 떠났다.

한강교 폭파계획에 대해들은 미 고문단 참모부장 그린우드 대령은 “부대가 한강교를 건너고 보급품 및 장비 등이 후송될 때까지 연기해야지, 한강교를 폭파하면 무엇으로 싸울 것인가? 한강교 폭파를 연기해 주시오! 미군의 보급품이 인민군의 손에 다 넘어가면 큰일입니다”라고 하며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간청하였다.

그러나 김백일 참모부장은 상부의 명령이라며 그 간청을 거절하였다. 2사단장 이형근 준장도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국군과 중화기와 장비가 철수하지 않았는데 한강교를 폭파해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때마침 이시영 부통령(현 새민련 이종걸 원내대표 증조부) 차가 한강교를 지나가면서 조금 지연된 데다가 삼각지 입구부터 한강교까지는 수만 명의 피난민이 도로를 꽉 메웠고, 인파에 떠밀려서 움직이는 상황이라 이미 때가 늦었다.

장창국 일행이 남한강 파출소를 150m 남겨 두고 있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이 울렸다. 다리위의 모든 차량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 일대는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타올랐고, 사람들은 붕 떴다가 강물 위에 떨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은 다리 밑바닥을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그 참상은 실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당시 다리위에 걷고 있던 약 1000여 명의 피난민들이 한꺼번에 한강물에 빠져 숨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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