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의회신문】본지는 특별기획으로 국내 정치외교학계의 큰 스승이자 한국 정치외교학계를 대표하는 존경받는 석학인 한승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최신 역작 ‘대한민국의 正體性과 價値’(2015년 4월, 나남 발행)의 내용을 시리즈로 전재(轉載)한다. 귀한 글을 본지 독점으로 연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한승조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이 글이 오늘의 세계 현상과 국제관계 그리고 대한민국의 행보 및 거취에 대한 독자 제위의 탐색과 인식에 많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註>

■ 현대사 백년전쟁과 격화되어 가는 문화투쟁

한국 좌파의 역사인식은 어둠과 증오의 역사관에 기초한 데 반해 우익 성향의 역사인식은 역사적 현실을 너무 안이하고 포용적인 현실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최근 거론되고 있는 ‘현대사 백년전쟁’은 좌파세력에 의한 새로운 문화투쟁선언이다. 이와 관련해 2013년 3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황호택 칼럼은 다음과 같이 글을 시작한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 조회 수 200만을 넘어섰다. 일선 학교에서도 일부 교사들이 ‘백년전쟁’을 계기수업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백년전쟁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의 100년을 친일과 반일세력의 대결로 보는 역사관이다. 이런 수준 미달의 다큐멘터리를 비판할수록 클릭 수를 높여줄 뿐이라는 무시전략이 있지만 지금은 그 단계를 넘어섰다. -

이 글을 통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몇 구절을 더 인용해 보겠다.

-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을 친일파 갱스터에 바람둥이, 협잡꾼으로 매도하고, 건국세력에 친일 컬래버레이터(협력자)라는 딱지를 붙여서 결국 무엇을 얻자는 것인가... ‘백년전쟁’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관(史觀)에 입각해 현란한 미디어 조작기술을 과시한다. 미래세대에게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한 균형 잡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민족문제연구소(반민족문제연구소의 후신)라는 친북좌파단체가 계속해온 문화투쟁이 너무나 허황되고 뻔뻔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친북좌파 세력이 즐겨 내놓았던 주장의 요지는 “한국의 보수우익 세력은 친일반역 세력이고 용공친북⋅진보좌파 세력만이 시종일관 반일애국노선을 견지했다”는 무고성⋅기만성이다.

이런 식의 친북좌파들의 문화투쟁은 이미 오래전부터 써먹어온 종북좌파의 단골메뉴였다. 그런 주장의 신선도가 이미 없어졌음이 염려되었던지 친북좌파들은 이번에는 ‘한국 현대사 백년전쟁’이란 새로운 설(說)을 간판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 같은 왜곡⋅편향된 교육을 일방적으로 받아왔기 때문에 한국 현대사의 진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들고 나온 ‘현대사 백년전쟁’만 해도 근거 없는 왜곡된 ‘좌파의 문화투쟁전략’일 따름이다.

(편집자 주 : 최근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검인정 국사교과서 역시 ‘현대사 백년전쟁’과 마찬가지로 좌파세력의 문화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탄생되었다.)

필자는 좌파의 문화투쟁에 오염된 많은 젊은이들이 역사인식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백년전쟁’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면서 ‘있는 사실 그대로의 진실’을 극히 일부분이나마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 현대사 100년은 친일파와 반일투쟁 애국세력 간의 전쟁기간이 아니었다. 둘째, 친일세력은 그렇게 구분될 수 있는 단일세력이 아니었다. 셋째, 한국 현대사 100년은 국권 피탈과 회복, 남북 분단과 대결, 그리고 남북 체제대결에서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과 북한 체제의 허구성이 확인된 시기였다.

현대사 100년을 1900~2000년까지의 시기로 한다고 하더라도 친일파와 반일민족세력 간의 투쟁으로 시종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현대사는 일반적으로 1884년 개항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1900년부터로 잡을지라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의 건국 및 산업화⋅민주화시대까지 포함한 시기가 한국 현대사 100년이다.

한국에서 친일파가 설치던 시기는 1905~1945년까지였다. 친일파와 항일투쟁파가 반목하며 대결했던 시기는 기껏해야 40년 정도를 넘지 못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친일파는 몸을 숨기고 항일세력에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전쟁을 100년 동안 계속했다는 것인가?

일제통치시기에 있어서 친일세력과 반일세력은 그렇게 명료하게 구분될 수 있는 집단세력도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국가관 역시 사람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일제강점기에 표면적으로 친일적이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이기주의 50%, 애국심 25%, 친일(표면상)감정 25%였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 사람을 친일파로 간주해야 하는가, 기회주의자로 간주해야 하는가?

조선총독부가 한반도를 통치했던 시기에 한국의 중상류층은 반일분자가 아닌 척을 했기 때문에 사회지도층의 위치에 있을 수 있었고, 비교적 잘 지낼 수 있었다. 이런 부류를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은 과장된 표현 아닌가?

일본의 육군 중장이었던 홍사익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일본 육사를 졸업했으며 일본군에서도 유능하고 우수한 장교로 인정받아 중장의 자리에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그가 진정한 친일분자였다면 태평양전쟁 중에 사단장, 군단장, 그리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지역전선의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차지한 보직은 필리핀 지역의 포로수용소장 자리였다. 결국 그는 일본 장병들이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하였다는 죄목에 대한 책임으로 전쟁 종료 후 연합군의 군정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많은 독립투사들까지 그의 사면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그가 진정한 친일분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던 한국인 일본군 장교 김석원 중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일본이 패망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한국의 해방을 기뻐했다. 자신의 여생을 한국군 육성에 바치고 싶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 때 영천(永川)전투를 지휘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영천이 뚫렸더라면 대구를 수호할 수 없었고 전 국토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촌 김성수의 일화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어떤 사람이 인촌 김성수의 집을 방문해 자신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보낸 사람이라며 독립운동 자금을 찬조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인촌은 돈이 다락 속에 있기는 하나 아직 독립운동 경비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사람은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만 하고 갔는데, 약속한 날이 되자 인촌은 외박을 나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시간에 와서 다락의 돈을 꺼내 갈 수 있도록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친일파와 항일파 간의 전쟁이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호에 계속>.

■ 한승조 주요 학력 및 경력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미국 UC Berkeley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남북대화사무국 자문위원
△한국국민윤리학회 회장
△월간 ‘民族知性’ 발행인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장
△(현) 아시아태평양공동체 이사장
△(현) 대불총 상임고문
△(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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