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창간 7주년 기념 특집기획 ‘정치 70년 비화’
‘이승만 정권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서진모 본지 수석논설위원

서진모 수석논설위원
【의회신문=서진모 수석논설위원】6.25사변, 이른바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1953년 6월중순,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극비리에 전국의 8개수용소 경남(거제) 전남지역 (광주)등에 붙잡혀있던 반공포로 3만 5000명을 일제히 석방한다.

이는 세계적 톱뉴스가 되었다. 당시의 국내사정은 굴욕적인 휴전반대 데모가 전국에서 발발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6월18일부터 이틀간 이대통령은 과감한 결단을 한 것이다. 마치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교과서 문제를 과감하게 밀고 나가듯…

그때 국민들은 석방된 포로들을 따뜻하게 대하여 주었고 심지어 ‘영웅’으로 취급하는 경향마저 없지 않았다. 전국의 각 행정기관과 국민들이 그들에게 옷과 식량을 전해주며 위로와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때 만일 이대통령의 그런 과감한 조치가 없었다면 그들 젊은 청년3만 5000여명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었을 것이다.

당시 그 반공포로들이 석방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공산당(김일성)측에서는 대단한 분노를 표시하고 남한 정부에다 그들을 모두 도로 잡아가두라고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은 그에 불응하였으며 석방 내지 탈출한 포로병들은 얼른 주민들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고 그들의 생활은 상당히 어려운 고비를 겪었지만 그래도 거의가 다 생존(부활)이란 행운을 얻었고 새 출발을 하였다.

매사의 정치적 결단에는 언제나 상대성 원리로 찬. 반 여론이 따를 수 있지만 어쨌거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 결단은 매우 잘한 결과로 나타났고 그것은 또 하나의 큰 획기적이고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동아일보 관련기사를 살펴보면, 그들 반공포로 석방에 대하여 ‘애국포로석방’ 이란 신문기사 제목을 달아서 실어 낸 것을 보면 참으로 그들은 오로지 나라를 위해 싸운 애국용사들이고 그중에는 전쟁에서 머리와 팔다리를 다쳐 소위 ‘상이군경’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도 조국을 위해 모든 애국심을 발휘했다.

어쨌거나 이 나라에 다시는 전쟁이란 아픈 상처와 고통은 없어야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반공포로 석방문제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승인 없이도 어떤 일 이라도 단독으로 처리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 해 준 것이다.

모든 국군과 군사시설이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이나 지휘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한국대통령이 휴전회담을 결렬시키기로 결심만 한다면 유엔군 측과 공산당측이 어떤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우리 정부의 능력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어 미국을 놀라게 하였다.

아무튼 이승만 대통령은 비록 가난한 나라의 통치자 이지만 그 자존심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일일이 미국의 눈치를 보거나 북한의 협박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대단한 애국적인고집을 세운 대통령이다.

다만 집권말기 장기집권의 욕심으로 3·15부정선거를 묵인내지 방조 한 것은 대단한 실책이며 그로하여 3·15직전에 내무장관직을 극구 사양하던 최인규(교통부장관)을 억지로 내무장관에 기용 한 것은 한 젊은 애국 공직자를 희생시킨 큰 실책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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