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재판부와 혁명검찰은?

▲ 옥중 최인규
【의회신문=서진모 수석논설위원】 자, 이 역사의 변혁기 때 참으로 기이한 사연 한줄기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라는 듣기만 해도 으스스한 법치기관 두 개가 설치되었다.

그 때 무자비하게 희생된 역사의 희생자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유독 억울하게 43세 짧은 일기로 사형수가 된 최인규(崔仁圭) 전 내무장관의 경우는 참으로 독특하고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사간이기에《의회신문》이 힘들게 발굴한 55년 전에 있었던 역사 스토리 한줄기를 여기에 싣는다.

이 스토리는 당시 남편의 사형을 바라보며 너무도 비통한 심정으로 최 장관의 미망인 강인화 여사(당시 38세)가 눈물로 써 내려간 비공개 스토리임을 밝혀둔다.

남편의 일로 밤잠을 못 자고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날 새벽에 웬 총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나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인지 아무 관심도 없이 무심하게 듣고 흘려버렸다. 그다음 날 아침 서대문 형무소로 남편의 면회를 갔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형무소 문 앞에는 무장경관이 서 있고 면회가 안 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돌아서 오는데 한 귀퉁이에서 전 자유당 부위원장 임철호씨 부인이 나를 잡아끌고 귓속말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격언과 같이 나는 군사혁명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또다시 혁명이 일어났으니 혹시나 남편을 살릴 길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 후 약 한 달 동안 남편을 면회도 못하고 재판도 일단 중지되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군사혁명정부의 정책은 과연 어떠한 방향으로 되어 가는 것일까, 군사혁명정부에서도 민주당이 만든 특별법에 의하여 재판을 하게 되는 것일까 무척 궁금했다.

얼마 후 군사혁명정부에서도 특별재판소라는 것을 만들어 다시 3.15 부정선거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5.16 혁명 하에 그 특별재판소는 민주당 때보다 더 삼엄하고 우리에게는 한층 더 무서운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혁명재판에서도 우리의 기대와는 반대로 역시 민주당이 만들어 놓은 특별법에 의하여 재판을 하게 된 것이다.

다시 재판은 계속되고 남편의 태도는 역시 종전과 마찬가지로 3.15 선거에 이루어진 모든 부정은 자기가 계획하고 시킨 것이며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시종일관 같은 태도였다. 재판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또다시「사형」언도가 내려지고 말았다. 이제 나의 남편을 구할 길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고 절망과 고통스러운 마음을 어디로 기댈 수 없는 가운데 떨고 있던 어느 날 김미희(김성곤 부인)씨 댁에서 좀 오라는 기별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곳에 갔더니 전 자유당 기획위원 부인 또는 자유당 정권 때 장·차관 부인들이 대개 다 모여 있었고, 그 가운데 좌석에 김두한 씨가 한 젊은 청년과 같이 앉아서 무언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잠깐 들어 보니까 여기 모여 앉아 있는 부인들의 남편들은 재판을 받으며 형무소에 있는데 그분들을 살려 내는 데 대한 이야기였다.

▲ 혁명재판소와 검찰부
나는 아무리 그 말을 들어보아야 무언가 가상적이고 더군다나 다른 자유당 동지들과 다른 특별한 위치에 있는 나에게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같이 정치를 하다가 함께 법의 심판을 받게 된 많은 자유당 동지들과는 달리 특별히 나의 남편에게만 이미 ‘사형’ 판결이 내려진 나의 입장은 모든 사정이 그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김두한 씨의 말씀이 하등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듯 열심히 말을 듣고 있는 모든 다른 부인들과는 별세계의 사람같이 방 한 모퉁이에서 나 혼자만이 모두에게 버려진 것 같은 소외감에 고독하고 아픈 마음을 안고 멍하니 앉아 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무관심한 채 앉아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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