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창간 7주년 기념 특집기획 '정치 70년 비화'
이승만 정권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의회신문=서진모 수석논설위원】"각하, 민주당 정권의 국회에서 쓰다 남은 예산이 9억 환이나 있습니다. 국회가 해산돼 버려 지금 이 예산이 공중에 떠 있으니, 이 돈을 극빈자 구제자금으로 전용하면 될 줄로 압니다."

5공 때나 6공 때는 터졌다 하면 천억이나 이천 억의 대형 금융사건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국민은 몇 억, 몇 십 억의 금융사건 같은 것에 대해서는 불감증이 돼 버린 지 꽤 오래다. 그런 판국에 9억 환 어쩌고 해봐야 새발의 피 같은 소리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1961 년도의 9억 환이라고 하면,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져서 900억원의 가치는 충분히 지니고 있지 않느냐 생각된다.

김재춘의 말을 들은 박정희는 귀가 번쩍 트이는 모양이었다.

"국회 예산이 9억 환이나 남아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국회 예산이 9억 환이나 남아 있다?"

박정희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눈치 같았다. 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치를 보였던 것이었을까? 5월에 혁명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을 당했으니 예산이 남아돌아 갈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각하, 각하께서 국회의 예산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시고 있었으니, 이것 또한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돈을 극빈자 구호금으로 전용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박정희는 생각이고 뭐고 해볼 겨를도 없이 승낙 했다.

"알았네, 그렇게 하게!"

그들이 말하는 혁명이었다. 혁명에 법 같은 것은 우스운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법률은 살아 있으면서도 적용의 가치는 서푼어치도 안 되었다. 대신 혁명의 지도자인 박정희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었다.

때마침 계절은 보릿고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인스턴트 세대들은 보릿고개가 무엇을 뜻하는 낱말인지도 모를 줄로 안다. 여기에 설명을 하면 이렇다.

예로부터 우리 농촌은 보리 이삭이 패이는 5월 말에서 6월 중순에 이르면 어지간한 소작인들은 벌써 양식이 떨어져 굶는 농가가 허다했다. 해방 뒤 농지개혁을 단행, 농토가 농사꾼의 소유로 돌아갔다고는 하나 보릿고개는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어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보물단지 유산처럼 보릿고개는 대대손손 대를 이어 물려지고 있었다. 1961년의 오뉴월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절량농가가 날이 갈수록 속출하고 있었다.

혁명공약을 작성할 때, 김종필은 이 보릿고개에도 혁명의 명분을 두어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조항을 넣었었다.

보리 흉년에 밀가루 한 되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군사정부는 남아 있는 9억환의 국회예산을 극빈자 구호금으로 돌렸던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국민들이야 군사정부가 하느님 같을 수밖에 없었다.

"혁명을 한 번만 더하면, 우리 같은 가난뱅이는 평생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살게 되겠네!" 가난한 사람들은 혁명의 고마움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김재춘이 노리고 있던 바가 이것이었다. 그가 이런 구상을 하게 되었던 것도 5.16 혁명의 명분에는 억지가 많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어쨋거나 <깡패소탕>과 가난한 <극빈자 구호> 등의 시책들로 해서 군사정부는 점차 민심을 끌어당겨 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뭔가를 보여주기만 하면, 민간정부로 전환할 때 군사정권이 재집권하게 될 것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장담해도 무방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의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