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申年, 시대와 不和했던 원숭이의 해
우리 시대는 그들을 다시 대면해야 한다

【의회신문=정행산 주필】 2016년은 육십 간지로 병신년(丙申年), 붉은 원숭이의 해다.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한 간지(干支)는 60년마다 돌아오는데, 십간 중 하나인 ‘병(丙)’은 1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늘 6으로 끝난다.

‘병(丙)’자와 ‘신(申)’자는 양기(陽氣)를 가진 글자라고 한다. 병신년인 2016년 올해는 밝은 기운이 가득한 해라는 얘기다. 지난 수많은 세월 속에 있었을 병신년 그 해마다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병신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찾아보았다.

936년 병신년에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개국했다. 후삼국의 통일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두 번째 민족통일로 간주되는 사건이다. 1236년 병신년에는 몽고의 잇단 침략을 부처(佛陀)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476년 병신년에는 조선조의 제10대 임금인 ‘문제적 인간’ 연산군이 출생했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1536년 병신년에는 대단한 두 인물이 태어난다. 이기론(理氣論)을 정리해 조선 유교의 학문적 기틀을 마련한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그 한 사람이며, 또 한 사람은 조선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로 꼽히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다.

송강은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을 지은 조선 최고의 문인이었으며 학자이자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이른 정치가였지만 닫힌 시대, 증오와 불의(不義)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는 끝내 시대와 화합하지 못하고 불화(不和)했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전국시대(戦国時代⋅센고쿠 시대)를 마감시키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태어났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1776년 병신년에는 조선조 후기의 중흥시대를 연 21대 왕 영조(英祖)가 세상을 뜨고 개혁군주 정조(正祖)가 즉위했다. 이 해에 미국이 독립하고,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이 출간되었다.

1896년 병신년에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의 전횡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高宗)과 왕세자가 대궐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 단 12척의 배로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공격에 맞서 싸운 전쟁 명량대첩을 그린 전쟁액션대작 ‘명량’의 한장면

이웃 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역사상 두 번의 뼈아픈 악연(惡緣)이 있다. 그 하나가 조선조 선조 때인 1592년 임진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 아래 왜군이 한반도를 침공, 7년 전쟁인‘임진⋅정유왜란’을 일으켜 조선 국토를 철저하게 유린하고 조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던 끔찍한 사건이요, 두 번째 사건은 1900년대 초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각종 협약⋅조약의 강제체결로 조선의 주권을 탈취, 식민지화하여 40년 가까이 지배하고 수탈하고 탄압한 사실이다.

지난 28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마침내 타결됐다. 이 불가역적(不可逆的)인 합의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획기적 사건이다. 지난‘일제 강점’의 역사에 의한 구원(舊怨)으로 인해 발목이 잡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한⋅일 관계가 마지막 남은 덫을 풀고 마침내 정상화의 물꼬를 튼 것이다.

당장은 양국에 쌓여 있는 뿌리 깊은 반목과 다른 목소리들을 통째로 극복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이제 한⋅일 관계는 건설적인 방향으로의 진전이 가능해졌다. 한⋅일 양국은 공히 한⋅미⋅일 3자 안보협력 등 폭넓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한⋅일 관계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일본 戰國時代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明을 정복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

이 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와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다시 한 번 되돌아봄으로써 오늘의 한⋅중⋅일 3국 관계와 동북아 안보지형을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세기 후반 군웅이 할거하던 150여 년간의 센고쿠지다이(전국시대, 1467-1602)의 내전을 거쳐 혼란기를 수습하고 일본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다.

일본 통일의 기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닦았으나 그 기반 위에서 통일을 다진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가 이 같은 바탕 위에서 일본의 통일을 완성했다.

천민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라는 걸출한 주군의 고모노(小者, 무사들의 시중을 드는 직책)로 일하면서 천하를 통일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국내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가까운 조선을 복속하고,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대륙으로 진출하여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은 전국시대를 통해 얻어진 조직화된 군사력과 신식무기로 1592년(임진년, 선조 25년) 4월 조선을 침공했다. 일본이 내건 조선 침공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 - 곧 “일본군이 명을 정복하고자 하니 조선은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는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두 차례에 걸친 7년간의 전쟁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을 선봉장으로 한 16만의 왜군은 1592년 4월13일 쓰시마(對馬島)를 출항하여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名古屋)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진두지휘했다. 왜군이 조선에 상륙한 지 불과 20여 일 만인 5월3일 조선의 수도 한양은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선조(宣祖)는 급히 의주(義州)로 몽진,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이듬해인 1593년 1월 조선족 출신인 이여송(李如松)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4만3천 명의 원군을 조선에 파병, 조명연합군은 그해 1월8일 평양성을 탈환하고 이어 개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와 개성 전투에서 대승한 이여송은 명나라 군대만을 이끌고 거드름을 피우며 한양으로 향하던 중 벽제관(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목숨만 겨우 건진 채 임진강 이북으로 도망쳤다.

명군과 왜군은 강화협상을 시작했으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왜군은 한양에서 일단 철수했으나 전국 각지에서의 약탈은 계속됐고 조선 관군 및 의병(義兵)들과의 전투도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 명나라 군대의 행패까지 겹쳐져 온 나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화에 휩싸였다.

백성들은 전쟁을 몰랐고
궁궐 문엔 자물쇠가 걸리지 않았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1596년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다시 왜군 14만 5천 명을 동원해 전면 재침공을 명령했다. 이 제2차 침략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임진⋅정유왜란은 조선시대 최대사건으로 조선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정치⋅문화⋅경제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대대적인 변화를 몰고 온 동양 근세사의 최대사건이었다.

임진⋅정유 양란의 결과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이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정권의 에도시대(江戶時代⋅도쿠가와시대.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백65년 동안)가 시작되었다. 에도(江戶)는 일본 도쿄(東京)의 옛 이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을 일으킨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18일 62세의 나이로 후시미 성(伏見城. 지금의 교토 후시미에 있던 성)에서 병사했다. 사인은 위암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독살 당했다는 설도 있다.

노량해전에서 결정적으로 대패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서 철수,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끝이 났다.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조선 도공 납치와 활자 등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와 도자문화와 인쇄기술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기간 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두로 도요토미 정권은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정권의 에도시대가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륙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던 명(明)나라가 멸망의 운명을 맞이한다. 동아시아 3국이 임진⋅정유왜란이라는 전란에 휘말려 있는 동안 만주 여진족은 힘을 비축하여 통일제국의 토대를 마련, 후금을 일으키고 청나라를 세워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당시의 상황을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1592년(선조 25년) 4월의 ‘선조실록(宣祖實錄)’은 임진왜란 초전의 양상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적선이 바다를 덮고 몰려왔다. 부산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朝貢)하러 오는 왜인(倭人)들로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적은 이미 성으로 기어올랐다. 태평한 세월이 2백 년 동안 이어져 백성들은 전쟁을 몰랐고 군현(郡縣)들은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당시 부산까지 왜군(倭軍)을 수송했던 병선은 7백여 척에 이르는 대선단(大船團)이었다. 그럼에도 부산첨사 정발은 침략군을 조공선단(朝貢船團)으로 여겼다. 왜인들이 침략해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도 못했기 때문이다.

부산진을 비롯하여 서울로 이르는 길목의 주요 고을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도성(都城) 한양이 일사천리로 뚫렸다. 대궐은 호위군사들조차 달아나 궁궐 문엔 자물쇠가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왜군이 부산진에 상륙한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전 국토는 왜적에게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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