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시대에 열린 미래를 지향했던 사람들
불륜의 폐쇄적 획일체제 그리고 새로운 물결

▲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은 영조 어진.
【의회신문=정행산 주필 】지금으로부터 꼭 240년 전인 1776년 병신년에는 조선조 후기의 중흥시대를 연 21대 왕 영조(英祖)가 세상을 뜨고 개혁군주 정조(正祖)가 즉위했다.

영조의 어머니는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 종(從)인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淑嬪崔氏)다. 천비(賤婢)나 다름없는 무수리 출신의 여인과 숙종 임금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정치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숙종에서 경종, 영조, 정조까지의 기간은 조선 전 기간 중 당쟁이 가장 심한 때였다.

숙종의 뒤를 이어 ‘장희빈의 아들’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희빈 장씨를 왕비에서 끌어내리고 사약을 내려 죽이게 했던 노론(老論)은 경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경종의 이복동생이자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延礽君⋅훗날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밀었다. 숙빈 최씨가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연잉군은 왕세제 시절에도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연잉군을 왕세제로 앉히는데 성공한 노론은 경종이 병약하니 임금의 건강을 위하여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세제를 앞세워 반대당인 소론을 무력화시키고 자신들이 정권을 독점하려는 당략이었다. 그러나 비록 군왕이 와병 중일지라도 신하가 대리청정을 입에 올리는 것은 왕정체제에서 역모나 다름이 없는 불충(不忠)이었다.

소론측은 이를 빌미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는 정변을 일으켜 노론 일파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연잉군은 당시 경종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역모 주동자로 거론되었으나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병약한 경종이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세상을 뜨고, 노론과 소론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연잉군은 1724년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이 연잉군이 조선조 21대 왕 영조(英祖)다. 그러나 영조는 재위 시에도 경종 독살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인좌의 난(1728)은 영조의 경종 독살을 주장하며 일으킨 대표적인 반란이었다.

영조는 국왕이었기 때문에 아들 사도세자를 자신의 손으로 뒤주에 가둬 죽여야 했다. 이 역시 당쟁이 원인이었다. 소론과 남인세력이 대리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를 부추겨 반역을 도모한다는 노론 측의 고변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사도세자를 탄핵하고 서인으로 폐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그녀의 친정아버지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혜경궁 홍 씨(惠慶宮 洪氏)의 친정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을 중심으로 한 풍산 홍 씨(豊山洪氏) 일문이었다.

정순왕후 김 씨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 씨(貞聖王后 徐氏)가 예순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두 번째로 들어온 왕비였다. 그녀가 열다섯 살의 나이에 영조와 가례를 올려 왕비로 책봉되었을 때 영조의 나이는 예순 여섯이었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왕비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에 열다섯 살의 정순왕후는 할아버지뻘이 되는 영조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정순왕후의 친정은 노론 계열에 속했다. 그러나 그녀가 왕비로 책봉되었을 무렵 조정은 소론(少論)에 동정적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뒤주 속으로 들어가던 세자는 두 손으로 뒤주의 양 모서리를 부여잡고 부왕을 우러러보며 애소했다.

“아바마마! 살려주옵소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자는 뒤주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영조 삼십 팔년인 1762년 임오년 윤 오월 임금이 정사를 보던 편전인 창경궁 문정전 뜰에서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힌 지 여드레 만에 숨을 거두었다.

조정의 중신이라는 자들이 작당(作黨)을 하여 백성이 아닌 당리당략을 위해 국정을 농단하고 모함과 간계를 일삼는 어둠의 시대, 군왕이 아들인 세자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불륜의 시대, 신하들이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저군(儲君)을 탄핵하여 굶어죽게 하는 불의한 소용돌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자 노론 벽파는 후환을 막기 위해 세손도 제거하려 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이산(李祘), 곧 훗날의 정조가 즉위하면 정순왕후의 친정 집안은 물론이려니와 노론 일파가 대거 몰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노론 벽파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 씨와 짜고 다른 종친을 추대할 계획이었다.

세손문제를 둘러싸고 노론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그의 치죄를 당연시했던 벽파(僻派)로 나뉘어졌다. 시파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중심이었고, 벽파의 영수는 정순왕후 김 씨의 오라비 김귀주(金龜柱)였다.

정쟁 속에 아들까지 죽여야 했던 임금은 역설적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영조는 탕평정치를 펴 조선 후기의 중흥세대를 열었다. 균역법을 시행해 양인의 세액 부담을 크게 줄였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해 민본정치를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백성들의 굶주림을 크게 덜어주었다.

국방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어청에서 조총을 제작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요새도 새롭게 구축 정비했다. 영조는 학문 진흥에도 큰 관심을 보여 ‘동국문헌비고’, ‘해동악장’ 등 많은 책을 편찬했다. ‘경국대전’ 이후 변화된 법제관계를 반영해 ‘속대전’도 펴냈다.

그는 역대 조선의 왕 중 가장 오랜 기간인 51년 7개월간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손자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인재를 등용하고 당색에 관계없이 서얼(庶孼)과 서북지방 출신도 과감하게 등용했다. 이와 함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관련자들과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정순대비의 친정 일가는 거의 멸문의 화를 입었다. 그녀의 오라비이며 노론 벽파의 영수인 김귀주는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쓸쓸하게 병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 벽파의 세는 여전히 등등했다. 집권당인 노론 벽파의 뿌리는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정조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인 적당에 둘러싸여 그들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고 웃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는 인내 속에서 정조는 당색에 물들지 않은 신진세력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희대의 천재 학자 정헌 이가환(貞軒 李家煥), 북학파의 영수이자 허생전⋅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한시 4대가로 청나라에까지 문명이 널리 알려진 북학의(北學議)의 저자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혜풍 유득공(惠風 柳得恭)⋅아정 이덕무(雅亭 李德懋)⋅강산 이서구(薑山 李書九) 등 명문장의 실학자들, 북학파의 선구자이며 실학자이자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한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그리고 손암 정약전(巽菴 丁若銓)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형제 등 수많은 문신 학자들이 나타났다.

특히 유득공은 1485년 정조 9년에 쓴 발해고(渤海考)를 통해 대조영의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주장함으로써 고려 이래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반도사관의 틀을 깨고 대륙사관을 처음으로 주창, 한민족의 영역을 만주대륙과 중국 요동지역으로까지 넓혔다. 이 같은 논리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들어 섬기는 모화사상에 따라 고조선을 반도에 가두어 왔던 반도사관을 뒤집어엎는 혁명적 사론(史論)이었다.

정조의 24년에 걸친 치세는 실로 위대했다. 다양성과 열린 미래를 지향했던 개혁군주 정조는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유일사상과 노론 일당독재의 폐쇄적 획일체제에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맞서기도 하고 때로는 초월하면서 서서히 당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였다. 정조 대에 출사한 문신 학자들은 한결같이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치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정조는 끝내 품은 뜻을 다 펴지 못하고 1800년 6월, 재위 24년 만에 마흔 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관위 관계자들이 제20대 국회의원선거 등록접수처 설치에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유사옥-정치적 암투와 음모의 결과
賊黨과 타협하며 미래를 지향한 正祖

한을 품은 채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던 정순대비 김 씨는 정조가 승하하고 열한 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섭정으로 추대돼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은 임금의 직접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정순대비는 마침내 최고의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고, 정조의 죽음으로 정순대비 김 씨의 친정과 노론 벽파는 다시 살아났다. 노론 벽파는 정조의 장례절차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당시 남인들은 국가와 사회조직의 개혁 개조를 요구하며 성리학(性理學)을 지배질서로 하는 현실에 비판을 가하고 혁신을 위해 서학(西學)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혁신사상은 일부 양반계층 뿐만 아니라 일반 소외계층에서도 호응을 얻게 되면서 그 세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초기에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여진 천주학은 점차 신앙운동으로 바뀌게 되어 마침내 정조 12년 사교(邪敎)로 규정받게 되었다. 효(孝) 사상과 군신 관계를 어지럽히고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금했으나 박해하지는 않고 탄력적으로 대응했다. 여기에서 조정 대신들의 입장은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신서파(信西派)와 철저하게 반대하는 공서파(攻西派)로 양분됐다.

정순대비와 노론은 반대당인 남인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명분을 천주교에서 찾았다. 남인 시파를 성리학을 부정하는 사교집단으로 몰아 철저하게 숙청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사건이 순조 원년 1801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이다.

이로써 조선 최초의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종교적・사상적 마찰이자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암투와 음모의 결과인 신유사옥은 노론과 생각을 달리하는 모든 세력,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기라성 같은 수많은 학자 선비들을 모조리 천주교 신자로 몰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신유박해(辛酉迫害)로도 불리는 이 사건으로 약 삼백 여명의 귀하고 아까운 학자⋅선비들이 참수를 당하거나 옥사했다. 유배를 당한 숫자는 손암 정약전⋅다산 정약용 형제를 비롯해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2016년 병신년, 오늘 이 땅의 정치권도 여전히 당리당략을 위한 이전투구에 여념이 없다. 정치가 나라를 그르치고 국민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너희들의 시대는 어떠한가?”“너희들의 시대에도 생각을 달리 한다는 이유로 상대 당을 적대하고 증오하는가?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국민과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은 없는가?”

저작권자 © 의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