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노무자들이 강제노역 당한‘지옥의 섬’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둔갑

▲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군함도의 진실' 동영상을 다국어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동영상은 일본 나가사키의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후 '강제노동이 아니다'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일본 정부에 맞서 군함도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내용이다. . <사진=서경덕 교수 제공>
【의회신문=정행산 주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일본의 정한론(征韓論) 태동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가 이른바 ‘일본 근대화의 산실’, 곧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8개 현(県)에 걸친 총 23개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이들 시설 가운데 나가사키현(長崎県)의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해저탄광 등 7개 시설은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 징용되어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강제노역과 학대 끝에 이름도 없이 죽어간 처절한 비극의 역사 현장이며, 야마구치현(山口県)의 쇼오카 손주쿠(松下村塾)는 조선 침략의 씨앗인 정한론(征韓論)의 태동지(胎動地)이다.

이제 일본은 제국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로운 민주국가로 거듭난 지 오래다. 많은 세월이 지난 과거의 아픈 역사를 굳이 들춰내 다시 반추하는 까닭은 묵은 감정을 부추겨 갈등과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다. 요동치는 동북아 안보지형에서 한국과 일본은 새로운 우방으로서의 동맹관계를 모색하며 나아가고 있다.

과거 일본제국은 한국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뼈에 사무치는 한(恨)을 남겼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하고 포용한다. 증오와 원망이 우리의 아픔과 한을 치유해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양국의 미래 발전에도 덫이 될지언정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은 새로운 긍정의 역사를 일궈나가야 한다.

다만 우리는 용서하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백성이 어떤 수모와 고통을 받게 되는지, 굴곡지고 아픈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 조선인 강제노역의 현장과 정한론의 태동지

일본 아베 정권은 나가사키시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약 19킬로미터 떨어진 섬 하시마, 일명 군함도(軍艦島)를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신청하면서 정한론의 배양지인 쇼오카 손주쿠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시작된 일본 근대화의 산실’로 등록에 포함시켰다.

쇼오카 손주쿠가 뭐하는 곳이었기에 일본 근대화의 산실로 꼽히며 메이지유신의 태동지로 불리는가? 쇼오카 손주쿠는 에도(江戶)시대에 조슈(長州)라는 지명으로 불리던 지금의 야마구치현 북부 해안도시 하기(萩⋅쑥 ‘추’자)성 쇼오카촌(村)에 위치한 작은 목조건물의 옛 학당(學堂)으로, 우리의 옛 서당(書堂)에 해당되는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당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 등을 주창해 일본 제국주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1857년 문을 열어 유신의 주역들을 길러낸 곳이다. 요시다 쇼인은 1854년 3월 미국의 페리 함대가 요코하마 앞바다에 내습해 개항을 압박했을 때 이 함선에 잠입해 미국으로의 밀항을 기도, 서양 선진국들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바쿠후(幕府)에 의해 감금되었다가 고향 하기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유수록(幽囚錄)’이라는 저서를 집필했다. 유수록의 내용은 “일본이 강성대국으로 성장하려면 좁은 섬나라에서의 군웅할거를 종식하고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홋카이도를 개간한 후 제후를 보내 통치토록 해야 하며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취하고 오키나와와 조선을 정벌하여 북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타이완과 필리핀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이었다.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이 요시다 쇼인인 것이다. 이 정한론과 북벌론(北伐論)은 정확히 30년 후인 1894년 청일전쟁과 그에 이은 조선 침탈로 실천됐으며, 대동아공영론은 그 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현실화됐다.

신병으로 풀려나 자택에 연금된 요시다는 1856년 자신의 집을 수리해 학당을 열었다. 유수록에 감명 받은 일본 각지의 젊은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요시다가 쇼오카 손주쿠에서 제자를 육성한 기간은 2년여에 불과하지만, 그가 배출한 인물들은 메이지 유신에 이어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을 주도했다.

쇼오카 손주쿠에서 요시다의 문하생으로 있었던 제자들 가운데 주요 인물로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왕정을 복고한 메이지 유신의 지도적 인물들이 많았다. 유신의 설계자이자 유신 3걸(三傑)의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를 비롯해 메이지 내각의 초대 총리대신 등 총리를 네 번이나 역임하고 한일강제병합을 주도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그들이다.

이 밖에 최후의 결정타로 도쿠가와 바쿠후(일명 江戶幕府)를 붕괴시키고 천황 친정형태의 근대 통일국가를 형성시킨 메이지 유신(1867년)의 주도적 인물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메이지 내각 총리를 두 번 지내며 군부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해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인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을사늑약의 모태 ‘카스라 테프트 밀약’의 카스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 겸 외상,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도 모두 쇼오카 손주쿠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며, 일본 아베 총리의 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 전 육군대장도 요시다 쇼인의 제자다. 아베 총리는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다.

요시다는 1859년 ‘안세이(安政)의 대옥(大獄)’이라는 옥사에 연루되어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만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 지난 17일 일본 나가사키의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방문한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된지 2개월이 되가는데도 '강제징용'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18일 밝혔다. 사진은 세계문화유산 등재이후 관광객들이 많아진 군함도 관광선.(사진=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제공)
◇ 조선인 노무자들이 강제노역 당한 지옥의 섬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23개의 메이지 시대 근대산업시설물 중 하시마(端島) 해저탄광 등 7개 시설은 태평양전쟁 기간 중 강제 징용되어온 조선인 노무자들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강제노역에 내몰렸던 곳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인 노동자가 전쟁에 동원되자 일제는 부족해진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식민지 조선인을 조직적으로 강제 동원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기업도 당시 동원된 조선인이 몇 명인지, 몇 명이나 사망했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비공식적인 자료에 의하면 태평양전쟁 당시 이들 7개 시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만도 약 5만7천9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이들은 이역의 1천 미터 바다 밑 석탄더미에서 죄수나 노예보다 못한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 고통에 시달리다가 사랑하는 가족과 정다운 고향을 그리며 원혼이 되어 죽어갔다.

하시마 탄광에서 노무자 관리를 담당했던 한 일본인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조선 현지에 직접 가서 사람들을 데려왔다. 여러 번 가서 총 4천여 명을 데려왔는데, 말이 데려온 것이지 실제로는 잡아온 것이다. 갈 때마다 지역 면장, 일본 헌병 등에게 돈과 선물을 건네주고 협조를 받았다. 면 단위 시골 마을에 낮에 가면 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그래서 밤에 갔다. 헌병과 함께 어떤 집에 들어갔는데 젊은 남자가 부인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다가가서 일본도를 들이대고 잡아왔다. 길에서 지나가는 조선인을 잡아 트럭에 싣기도 했다.”

하시마 해저에 석탄이 매장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이 1890년 이 섬을 매입해 해저탄광으로 개발했다. 그리고 징용되어온 조선인 노무자들이 석탄 채굴을 위해 투입됐다. 하시마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지옥’이었다. 육지와 철저하게 고립된 이 섬에서 징용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잔인한 폭력 속에 사투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해저 700미터 지점에서부터 채굴을 시작해야 하는 하시마 탄광의 특성상 조선인 노무자들은 평균 해저 1천 미터 지점에서 하루 12시간 씩 좁고 낮은 갱도에서 엎드린 채로 석탄을 채굴해야 했다. 40도가 넘는 막장에서 폐는 진폐증으로 썩어갔고 고된 노동에 뼈가 삭기도 했다. 갱도가 무너져 죽거나 견디다 못해 바다로 도주하다 익사하거나 잡혀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조선인 노무자들은 이 섬을 ‘죽음의 섬’으로 불렀다.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도 전쟁 유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만 등재 명분은 나치가 저지르고 자행했던 범죄를 사실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어두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문화유산은 국가 간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의 대화를 통한 아름다운 교감과 우호를 증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일본이 비인도적 강제노동이 자행된 역사를 외면한 채 이들 시설을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신청한 것은 국가 간에 불필요한 분열과 증오를 조장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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