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행산 주필
【의회신문=정행산 주필】이번 20대 총선에서 가장 큰 관심꺼리 가운데 하나가 새누리당이 원내 과반을 건질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새누리당 후보들 사이에서 "시장에 유세를 다니다보면 TV에 박 대통령 얼굴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리는 상인들이 많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대통령 눈 밖에 난 당내 비박(非朴)계를 철천지원수처럼 증오하고 독하게 쳐낸 '공천 파동'의 역풍이었다.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을 위한' 새누리당의 계파 투쟁은 서막(序幕)에서 잠시 중단된 상태다. 총선 끝난 후 어느 시점에 이 '막장 드라마'는 다시 개막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막장 드라마를 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어떤 모양과 방향으로 이끌어갈지 궁금해 하고 있다.

당초 박 대통령 취임 초기만 해도 많은 국민은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박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와 지지기반은 '실적'과는 상관없이 상당부분 균열현상을 보이고 있다.

왜 그런가? 다소 고집스럽고 편협하며 권위주의적으로까지 비춰지는 대통령의 개인 성격 탓이 크고, 특히 이번 '공천 파동'을 통해 보여준 독하고 지극히 전제적(專制的)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실망한 점이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여기에 더하여 대통령 '측근'들의 과잉충성과 오만함 또한 일부 국민들로 하여금 박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게 만드는 데 적지 않은 몫으로 작용했다.

손바닥 비비고 아양 떠는 데 이골이 난 이른바 '측근'들은 완장 하나씩 얻어 차고 대통령의 비위만 맞추면서 호가호위했다. 국민을 우습게 알고 오만하게 설치다가 그들은 결국 ‘박근혜 이미지’에 오물을 뒤집어씌우고 말았다.

'완장'들은 나랏일보다는 '주군(主君)의 속내'가 절대적 가치이고 십계명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의연히 떨쳐 일어났다. 그리하여 자기 당 내 '무엄하고 괘씸한 불충(不忠)의 무리들'을 의분(義憤)에 떨며 '증오'하고 '모욕'하고 '짓밟고' '쳐내는'데 헌신 봉공했다. 이런 시정잡배들의 노름판 패싸움 같은 막장 드라마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기가 막혔다.

과거 왕조시대에도 총명한 군주를 폭군이나 얼간이로 만들어 나라를 ‘개판’으로 휘저어버린 주범은 항상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약삭빠르고 교활한 측근들이었다.

중국 당(唐)나라 때 황제의 남다른 총애를 한 몸에 독차지했던 동양 최고의 미인 귀비(貴妃) 양옥환(楊玉環, 719-756)은 그 총애를 무기삼아 휘두르다 종내에는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손바닥 비비는 재주가 아니라 얼굴 예쁜 게 화근이었던 셈이다.

귀비(貴妃) 양옥환(楊玉環). 흔히 양귀비(楊貴妃)로 알려진 이 절세의 미녀는 옛 촉(蜀)나라 땅 사천(四川) 출신으로, 본디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 이융기(李隆基, 685-762)의 열여덟 번째 아들 이모(李瑁)의 비(妃)였다.

미모가 천하일색인데다 총명하고 시(詩)와 가무(歌舞)에 출중했던 양옥환은 오지 산골 처녀인데도 함의공주(咸宜公主)의 눈에 띄어 열여섯의 나이에 황제의 아들 이모(李瑁)의 비(妃)로 간택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 인자하고 현명한 후궁 무혜비(武惠妃)가 갑작스럽게 병사하자 실의에 빠진 현종 황제는 어느 날 화청지(華淸池) 온천으로 행행(行幸⋅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는 것)을 나갔다. 현종은 이 때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양옥환을 우연히 처음 보게 된다.

황제는 그녀의 백옥 같은 살결과 일찍이 보지 못했던 천하일색의 눈부신 미모에 넋을 잃었다 그녀가 열여덟 번째 왕자의 비(妃), 그러니까 며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황제는 양옥환을 자신의 후궁으로 들일 작정을 했다.

현종은 왕자 이모를 다른 여자와 재혼시켜 먼 변방으로 내보내고 며느리인 양옥환을 마침내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패륜이 저질러진 것이다. 이때 현종의 나이 쉰일곱, 양옥환은 스물 셋이었다.

패륜의 결과는 참담했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 그녀는 후궁이 된 지 6년 만에 귀비(貴妃)로 책봉되어 황후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면서 황제를 조종하여 전횡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현종의 치세 전반기는 '개원(開元)의 치(治)'라 하여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태평성세를 구가했다. 그러나 양귀비를 맞아들인 후 현종은 이성적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양귀비는 우선 자신을 후궁과 귀비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황제의 패륜에 대해 감히 "아니 되옵니다" 했던 꼿꼿한 조정 중신들과 선비들부터 설거지했다.

그리고 바른말로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눈 밖에 난 관료들은 '불충(不忠)'과 '배역(背逆)'으로 규정해 가차 없이 쳐내고 대신 친인척들을 황제에게 천거하여 대거 요직에 등용했다.

그녀의 세 자매들도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되었고 양귀비의 사촌 오라비이자 건달 출신인 양소(陽釗)는 황제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시어사(侍御史) 겸 감찰어사의 자리에 천거되어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승상(丞相)의 자리에까지 오른 양국충의 권세와 전횡은 나라 안팎을 뒤흔들었다. 승상은 황제를 보좌하는 수석 보좌관이자 조정의 영수로,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그는 현종 말기의 대표적 부패권력이었으며 종내는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양귀비를 등에 업은 '친양(親楊⋅친 양귀비 파)'의 환관과 탐관오리, 간신배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져갔다.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라 했으나, 양귀비 일파는 권력의 맛에 취해 천심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종 황제가 변방의 젊은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을 궁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을 때 안록산을 처음 만난 양귀비는 그에게 호감을 느껴 그를 측근으로 삼았고, 급기야 양귀비는 자신보다 십여 년이나 나이 많은 무장(武將) 안록산을 양자로 삼아 그에게 20만의 병권을 쥐어주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양귀비의 총애와 신임을 두고 사촌 오라비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치열한 충성경쟁과 갈등이 시작된다.

마침내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자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고 뜻있는 선비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20만 병권을 쥐고 있는 안록산은 라이벌인 양국충을 제거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 부하 사사명(史思明)과 공모하여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이 '안사(安史)의 난'이다.

반란군이 장안(長安⋅지금의 西安市)을 향해 노도처럼 쳐들어오자 현종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양귀비와 함께 그녀의 고향인 옛 촉(蜀)나라 땅 사천(四川)을 향해 황급히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황제 일행이 마외파(馬嵬坡)에 이르렀을 때 호위하던 황제의 근위병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근위병들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양귀비와 그 일파들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며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뒤에선 반란군이 쫓아오고 근위병들은 꿈쩍도 하지 않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황제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던 양국충 등 일당이 근위병들에게 넘겨져 처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고, 양귀비는 현종에게 눈물로 하직인사를 한 후 나무에 비단천으로 목을 매었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여인,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10여 년 권세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 때 현종의 나이 일흔 하나, 양귀비는 서른여덟이었다.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은 다른 여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통한의 세월을 살다가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양귀비는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백낙천)는 죽음 앞에 선 귀비 양옥환의 처연한 모습을 서사시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玉容寂寞淚闌干 (옥용적막누란간)
梨花一枝春帶雨 (이화일지춘대우)

옥 같이 흰 얼굴에 쓸쓸히 눈물 맺히니
배꽃 한 가지가 봄비에 젖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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