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의 재집권 꿈 보수정치의 위기 될 수도

▲ 26일 오전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1회 제주포럼 개회식에 참석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의회신문】차기 대권주자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줄곧 선두를 달리고 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새누리당 친박계가 대권주자로 영입하기로 한 것은 사실상 기정사실이 된 것으로 관측된 가운데, 반 총장이 지난 25일 5박6일 일정으로 방한해 여야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반 총장은 방한 첫날 제주에서 열린 관훈클럽 간담회에 참석해 대선 출마를 시사하는 여러 발언들을 내놓음으로써 기대를 훨씬 웃도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심지어 반 총장은 대선 후보로서 고령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미국 대통령에 나온 사람들이 민주당은 전부 70대”라며, “제가 1년에 여행을 몇 십만 마일이나 하지만 하루도 아파서 결근했다거나 감기에 걸려 쉰 적이 없다. 체력 같은 건 별 문제가 안된다”고도 했다. 반 총장의 올해 나이는 만 72세(1944년 생)이다.

반 총장은 지금까지 국내 여야 정치권의 러브콜에 대해 분명한 입장 표명을 유보해 왔다. 이 날도 여전히 구체적인 출마계획에 대해서는 “가족 간에도 이야기가 좀 다르고 해서 지금은 뭐라 말씀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하지만 평소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신중한 스타일의 반 총장이 이번 방한에서 보여준 행보와 발언들은 이전과는 달리 진일보한 측면이 많다. 그를 잘 아는 인사들은 "반 총장은 속에는 온갖 감정이 요동쳐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고 평한다. 또 어떤 인사들은 "다소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의뭉스럽고 답답하고, 좋게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 기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친박의 차기 대선 그림은 '친박의 재집권'

▲ 박근혜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해 9월 26일(현지시간) 오후 유엔 컨퍼런스룸에서 열린 새마을 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에서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새누리당 친박 측에서는 "반기문 총장은 새누리당에게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친박이 차기 대선에서 원하는 그림은 '친박의 재집권'이라는 뜻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은 일찍이 총선 이전부터 자신들의 손으로 차기 대통령을 만들어 박 대통령 임기 이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당 내에는 정작 마땅한 '친박계 대권 주자'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 반 총장을 7번이나 만났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새누리당의 유력한 대권주자인 비박계 김무성 당 대표와의 갈등과 맞물리며 박 대통령이 차기 새누리당 대권주자로 반 총장을 찍었음을 시사했고, 반 총장은 '김무성 대세론'에 맞서는 '대망론'의 주인공이 됐다.

사실, 여권 일각에서 박 대통령과 친박이 반 총장을 대선후보로 찍었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이보다 훨씬 전이다. 2014년 말 새누리당 내 친박모임인 '국가경쟁력강화포럼'에서 반기문 대망론이 처음 등장했고, 그 후 정치권에서는 줄곧 친박계가 김무성 대표에 맞설 대안으로 반기문 총장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러던 차에 새누리당은 지난 4.13 총선에서 국민의 호된 심판을 받아 원내 제2당으로 떨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박 대통령 임기 이후는 고사하고 박 대통령의 레임덕과 함께 친박은 서서히 지리멸렬해 존재감조차도 사라질 위기에 있다.

따라서 친박 측은 어떻게 하든 차기 대권을 잡아 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상황에서 반기문 총장이 최적의 카드라고 박 대통령과 친박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친박 입장에서 반기문 총장은 고립된 처지를 돌파할 수 있는 좋은 카드일 수 있다.

◇ 정치적 리더십과 능력 검증된 바가 없어

그러나 과연 반기문 총장이 친박에게 있어 최적의 카드일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반 총장은 지난 8년 동안 국내 정치와는 동떨어진 유엔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그런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 갑자기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면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그에 따른 반 총장의 정치적 가치와 신념, 청사진 등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국민은 검증해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그의 정치적 리더십과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 검증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된 건 대한민국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국내 정치에 대한 능력과는 별개의 차원이다. 유엔에서의 조정자 역할과 국내 정치판에서의 조정자 역할은 다르다. 더욱이 해외 언론들은 반 총장을 역대 최악의 사무총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혹평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반 총장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부르며 "반 총장은 독재자들의 잔혹 행위에 대해 너무 자주 침묵하며 유엔을 추악한 타협의 무대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반 총장이 미얀마 등 독재자들과 싸우는 대신 대화와 타협을 앞세우며 멈칫거리는 방식의 '눈치 보기' 외교를 펼쳤다는 점이 비판의 근거였다. 이는 전임자인 코피 아난 총장과 대비된다. 코피 아난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등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는 스타일이었다.

반 총장이 대통령이 되려면 다른 대권주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장벽을 돌파해야 한다. 혹독한 검증을 거치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우선 검증 과정에서 수모에 가까울 정도로 발가벗겨지고 온갖 비판이 불거질 수도 있다.

◇ 친박 나서면 부정적 이미지 덧씌워질 수 있어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4월1일 오후(현지시간)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 시나리오 기반 정책토의에 참석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모두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이런 절차를 감수하면서 통과의례를 돌파하려면 무엇보다도 본인 스스로 강한 권력 의지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검증을 통해 대권주자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입증하겠다는 강한 권력 의지를 보여야 한다.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으려는 스타일의 반기문 총장에게 과연 이런 권력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어느 날 친박의 등에 덜렁 업힌 대권주자'라는 대목도 반 총장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해지고 친박이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비박계의 대권주자나 야권과 대결해 승리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 비박계든 야권이든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은 오랜 동안 정치권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역량을 다져온 정치인들이다. 국민들은 대부분 그들의 정치적 성향을 대충은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반 총장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대권 레이스가 본격화되면 반 총장의 강점과 약점이 발가벗겨지면서 그의 인기와 지지도는 출렁일 수 있다.

외부에 있는 사람을 영입해서 별안간 대통령으로 만든다는 것, 그런 일은 쉽지 않다. 국내정치에 대한 경험이 없는 후보를 옹립하려면 그에 따른 대비책을 절차를 통해 여당 내부에서 마련해야 하는데, 박 대통령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 모를까 현재 새누리당 사정은 그럴만한 상황이 못 된다. 비박은 ‘반기문 대망론’에 부정적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박 대통령과 친박이 나서면 오히려 반 총장에게는 부정적 이미지만 덧씌워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반 총장이 '충청 대망론'의 당사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친박과 반 총장의 연합을 TK와 충청의 연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친박과 비박의 갈등이 부각되고 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이 올수록 친박에게는 인기 있는 반기문 총장의 필요성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반 총장의 본선 경쟁력이다. 당내 친박계가 ‘반 사무총장만 옹립하면 내년 대선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그와 같은 인식이야말로 새누리당의 한계이자 더 큰 위기일 수 있다.

대통령이 되려면 본인의 분명한 권력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반 총장에게는 그게 모호하다는 점, 친박 실세가 킹메이커 역할을 하려는 점 등은 자칫 보수정권이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정권이 바뀌게 될 것이란 관측까지 가능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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