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홍준표 대통령 예비 후보
국민의힘 홍준표 대통령 예비 후보

1953년 11월 20일,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 남지리 서동마을에서 2남 3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때 이름은 홍판표(洪判杓).

그의 아버지는 무학에다 소작농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어머니가 고리 사채꾼에게 머리채를 잡혀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창녕군과 합천군, 대구시 등지를 전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6군데나 전학을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수 없어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했고 초등학교에서도 1등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영양 부실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몸이 야위었고, 초등학교 졸업 당시 키가 124cm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합천군을 벗어나 대구시 영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숙식은 대구 직물 공장에 취직한 누나 방에 얹혀 살며 해결하기로 했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부친과 8km를 걸어 대구행 버스를 탔는데, 무거운 지게를 진 부친 뒤에서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대구 대명동 사글세방에서 누나들이 싸주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공부했다. 그나마 도시락도 없이 혼자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홍준표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결국 대구로 이사왔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 단칸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하루 4~5시간만 자고 공부해 영남중학교에서도 1등은 그의 차지였지만 명문 경북고등학교가 아닌 영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북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영남고가 좋지 않은 학교였다는 소리는 아니고 오히려 준수한 수준의 학교였다. 하지만 경북의 일류 명문이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본인에게 컴플렉스였고, 출세에도 핸디캡이 됐다.

심지어는 대학 첫 소개팅 자리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이 나왔는데 그녀가 "집이 어디냐?", "대구다", "그럼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냐?" 하기에, "영남고다" 그랬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이때 상처를 받은 이후로 미팅 종류의 활동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밑에 첨부된 그의 대학 시절 사진만 보더라도, 그의 지인들은 당시 홍준표 하면 그가 늘 신던 검정 고무신을 떠올리곤 한다.

소개팅녀의 행동이 혹시 영남고 때문이 아니라 그의 패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출신고를 묻는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의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컴플렉스는 검찰 생활에까지 이어졌는데,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등학교 출신들이 즐비한 검찰 조직 내에서도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고등학교 동문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문화가 만연하여 비주류의 설움을 느껴야만 했고, 법학과 졸업생도 아니었으며 가난한 흙수저 출신인 것까지 더해서 검찰 내에서도 그야말로 개무시당했다고 한다.

그는 커리어에서 평생 아웃사이더 또는 비주류를 자처했는데, 그 원인으로 출신고등학교에 대한 열등감, 자신의 가난했던 집안 배경 콤플렉스를 꼽는 사람도 있었다.

원래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원래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었다고 한다. 경북대가 국립대라서 학비가 저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어, 아버지가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라고 해서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자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구광역시 토박이가 아닌 아버지가 시장통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검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에 1972년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생 시절 때는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5층 여관집에 출퇴근 가정교사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대학생활 4년 중 고연전조차 딱 한 번밖에 참여하지 못했을 정도로 바빴다. 그 와중에도 2학년 때인 1973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선후배들과 중지를 모아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처음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었다.

때문에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고.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시국 행동은 못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동기로는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 이승재 해양경찰청장, 김성곤의원, 박계동 국회사무총장, 송하진 전북지사 등이 있다.

그가 대학생 시절 기거하던 종암동의 하숙집 동기들도 유명하다.

당시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이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지척인 현재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때여서, 하숙집 동기들이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이때 같이 친하게 지낸 이들이 박재완 전 기재부장관(서울대학교 경제학과 73학번),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서울대학교 무역학과 72학번), 서충일 전 STX 팬오션 부사장, 정해문 전 주태대사 등이었다.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광역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 뒷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 집까지 다 타서 가족들은 때마침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으로 옮겨갔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 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 그때 "불공평한 세상 한 번 바꿔보자"고 다시금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당시 부친이 추운 모래밭에서 근무하니 회사에서 술이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줬다고 한다. 고된 노동과 무리한 음주로 몸이 상해서인지 부친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역시도 "세상이 디비졌으면..." 하는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고 박정희 유신반대 학생운동을 하며 총학생회 지하유인물을 작성하다가 글씨체로 추적당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8시간 동안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문제적 인간 홍준표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남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따라 더 이상 나가지 않았고 성북경찰서에서 풀려나면서 고시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간다.

사법시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72학번인 그가 6년이나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생활을 이어가던 중, 고려대학교 앞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서 일하던 당시 20세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게 반했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역시 없었지만, 같은 은행에 다니는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데이트를 하고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같은 집에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그 여인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 홍준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전라북도 군산시에 살고 있는 장인, 장모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렸는데,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장인은 뒤에서 딸에게 "그거 구름잡는 놈이다. 택도 아닌 놈이다. 그런 놈이 고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고.

장모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 그랬다며, "어떠셨대?" 하고 묻는 그에게 이순삼이 솔직히 털어놨단다.

그 덕에 "장모는 혹 용돈을 드려도, 장인어른은 용돈은 커녕 26년간 내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고 훗날 2017년 자유한국당 후보 군산시 유세에서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정작 마지막에는 홍준표가 장인 모시고 병수발하고, 임종도 지켰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장인이 "옛날에 잘못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사과하자, 이에 홍준표는 "잘못한 줄 이제 알았습니까. 편하게 가십시오."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가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 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군 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방위병으로 근무하게 됐는데, 사법시험에 붙지 못해 고향에 가기 창피했던 그는 처가가 있던 전라북도 부안군의 해안초소에서 복무하였다.

저서 '나 돌아가고 싶다'에 따르면 대학교 4학년 때 신검에서 48kg의 저체중과 근시 병력으로 인해 14개월 방위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병역 때문에 애인과 헤어지는것이 싫었고 고시 공부를 중단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출퇴근이 가능한 14개월 방위병 근무를 반겼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홍준표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법무관으로 제대한줄 알고 있었다가 실은 방위병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실망했고, 홍준표가 방위병으로 근무한것은 적법한 것이었지만 공직 생활을 하면서 왠지 병역 의무를 부실하게 이행한거 같아 미안하고 창피했다고 토로했다.

이후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해병대에 지원해서라도 떳떳하게 병역을 마치고 싶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렇게 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그리고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30살, 호적상 29살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어 입교한 사법연수원 동기(14기)생으로는 추미애, 주호영, 신기남, 정종섭, 권순일, 이기택, 이석태, 채동욱, 김진태 등이 있다.

"제 아버지는 무학입니다. 제 어머니는 문맹입니다. 아버지는 40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2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홍준표는 부모로부터 유산 받은 것 단 1원도 없습니다.

저는 무지렁이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 무지렁이 출신이 우리 한국을 건국하고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화를 이룬 이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꿈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돈 있는 대통령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 쫓는 대통령도 안 되겠습니다. 꿈이 있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서민이 꿈을 꾸고 마음대로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꿈이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제 인생의 멘토는 이순신 장군도 아니고, 세종대왕도 아니고, 김구 선생도 아닙니다. 제 인생의 멘토는 내 엄마입니다.

제가 나이가 60이 넘어서도 제 인생의 멘토는 내 엄마입니다.

우리 엄마는 글을 모릅니다.

그런데 무지렁이처럼 살았어도, 자식 사랑하고, 남편 사랑하고, 가족 사랑하고, 그렇게 헌신적으로 살았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꿈이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내 엄마처럼 착한 사람 한번 잘 살게 해 줘 보자, 그것이 내 마지막 꿈입니다."

저서

홍 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 - 1996년

이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 - 2000년

나 돌아가고 싶다 - 2005년

변방(이제, 중심을 꿈꾸며 힘들었덩 삶의 가장자리를 이야기하다) - 2009년

홍준표가 답하다(변방에서 중심으로) - 2017년

소신이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 - 2017년

꿈꾸는 대한민국 - 2020년

 

저작권자 © 의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