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신문=심백강 박사】퇴계전서,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의 주요 고전들을 번역한 국내 굴지의 한학자이자 한·중고대사를 전공하고 중국에서 역사학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인 저자 심백강 선생은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포함되지 않은 고조선의 비자료, 사대 식민주의자들이 밝히기를 꺼린 채 감추어 왔던 ‘고조선의 숨은 자료’들을 새롭게 밝힌다. 본지에서는 영원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위대한 고조선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남은 과제에 대해 5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왜 고조선을 되찾았다고 말하는가

‘조선성’과 고조선

한국인 가운데 중국 하북성에 있는 노룡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하북성 진황도시에 소속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는 기록이 송나라 때 낙사라는 학자가 편찬한 지리총서인 ≪태평환우기≫에 실려 있다.

≪태평환우기≫는 노룡현 조항에서 고죽성, 요서성과 함께 조선성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죽성 다음에 조선성, 조선성 다음에 요서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죽성 부근에 조선성이 있고 조선성 인근에 요서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조선성이 왜 송나라의 하북도 평주 노룡현 지역에 고죽성, 요서성과 함께 폐성으로 남아있었던 것일까.

≪태평환우기≫의 저자 낙사는 노룡현에 있는 조선성을 소개하면서 “조선성은 바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 황폐한 성이 남아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태평환우기≫의 설명은 그 당시 기자가 찾아갔던 조선은 오늘의 대동강 유역 평양에 있었던 한반도 조선이 아니라, 하북성 동쪽 조하 유역 노룡현에 있던 요서조선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이 기록 하나만 놓고 보면 얼른 수긍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라고 한 ≪산해경≫, “중국 남쪽 송나라에서 북방 요나라 서울 영성으로 갈 때 하북성 고북구 부근에 있는 조선하를 건너서 갔다”라고 한 ≪무경총요≫와 ≪왕기공행정록≫, “선비족 모용외가 조선 땅을 기반으로 발전했고 모용황이 조선공에 봉해졌다”라고 한 ≪진서≫와 “갈석산 부근에 조선국이 있었다”라고 한 ≪회남자≫의 기록 등과 대조해 보면, 기자가 찾아갔던 그 조선은 대동강 유역 평양이 아닌 하북성 조하 유역 평주 노령현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신으로 다가오게 된다.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조선성 유적이 있다는 ≪태평환우기≫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이씨조선에 앞서 압록강 서쪽의 발해만 부근에 있었던 요서조선의 실체를 오늘에 확실히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조선공’과 고조선

≪진서≫ 109권 재기(載紀) ‘모용황전’에는 요서에서 활동하던 창려 사람 선비족 모용황이 전쟁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운 공로로 325년 조선공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모용황은 선비족 모용외의 아들로 태어나 요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당시 그의 행동반경은 선비족의 근거지인 오늘의 시라무렌강 상류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어떻게 조선공을 봉할 수 있었을까.

진나라 시대의 기록인 ≪진서≫에는 당시 낙랑군이 평주에 설치되어 있고 낙랑군 25개 현 중의 첫째 현으로서 조선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용황은 진나라 때 사람이니 그가 봉해진 조선은 바로 이 당시 평주의 조선현일 것이다. 그를 조선공으로 봉한 것은 그가 조선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어서였을 가능성이 많다.

낙랑군 조선현은 모용황이 활동하던 지역인 시라무렌강 유역 부근 요서에 있었고, 선비족의 조상들은 조선의 옛 땅을 근거지로 발전했으며, 조선은 역사·문화적으로 모용씨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에게 조선공을 봉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활동하며 전공을 세운 모용황에게 아무런 연고나 관련도 없는 수천 리 떨어진 대동강 유역의 조선현을 떼어서 그에게 봉지로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진서≫의 기록은 고조선과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결정적 단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 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조선국’과 고조선

상고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금석문만큼 중요한 사료는 없다. 금석문은 한번 글자를 새겨 넣은 다음에는 위조나 변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로공신도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농우총관부장사를 역임하고 태자소보에 증직된 두로영은공의 신도비다. 그의 본래 성은 모용이고 두로은으로도 불려 ‘두로은비’, ‘모용은비’로 불리기도 한다. 이 비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중국 섬서성의 함양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1500년 전 요서에서 활동한 선비족 두로영은의 신도비문을 주목하는 까닭은 요서에 있었던 고조선국의 실체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내용이 이 비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로공신도 비문에 나오는 명문의 첫 구절은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다. 요서에 있던 조선국과 고죽국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의 건국과 통치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조선건국 고죽위군” 이라고 요약한 것이다.

모용선비의 주요 활동지역은 진한시대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하북성 서북과 중부 지역까지를 포괄했다. 이 지역은 이른바 고조선이 건국을 했고 고죽국이 통치를 했으며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그래서 모용선비의 역사를 이야기 하며 “조선건국 고죽위군”이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두로영은의 신도비문에 나오는 이 짧은 문장은 요서에서 고조선이 건국을 하였다는 사실을 그 어떤 자료보다 확실하게 대변해주고 있다.

이 문구가 일찍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인용이 안 된 것은 천추에 한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정체를 드러낸 것은 한국사의 재정립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한편으론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저자소개】심백강 | 역사학 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퇴계전서,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의 주요 고전들을 번역한 국내 굴지의 한학자이자 동양학자이다. '이야기로 배우는 동양사상'으로 동양사상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사고전서'를 바탕으로 한 역사연구서를 펴내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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