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백강 원장
【의회신문】12세기 중국 동북의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우리 밝달민족의 한 갈레인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우고 중원의 한족 왕조인 북송을 멸망시켰다. 그 후 북송 세력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절강성 항주에 수도를 정하고 남송왕조를 세워 명맥을 유지했다.

악비 (1103~1142)는 가난한 농노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탕음현(湯陰縣) 출신이다. 금나라 여진족 군대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 초기의 장군이다. 문장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장수로 일컬어진다. 다만 주전파(主戰派)인 그는 주화파(主和派)인 당시 재상 진회(秦檜)와 대립하다가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고 1204년 왕으로 추존되어 악왕(鄂王)이 되었다. 명나라 이후 중국 한족의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다.

중국의 어린이 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한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초등학생이 쓴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보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네 글자를 가슴에 새겨두고 되새겼다"라고 말했다. "정충보국" 네 글자는 악비의 고사로부터 나온 문구이다. 악비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네 글자를 악비의 등에 문신으로 새겨 준 것으로 전해진다. 악비의 강한 애국심은 이런 어머니의 훈도로부터 비롯되었다.

"악비의 혼은 중화민족의 정신을 대표한다. 그는 바로 민족혼이다" 이는 중국의 국부로 일컬어지는 손문이 악비에 대해 평가한 말이다. 손문이 악비를 '중화민족의 민족혼'으로 평가한 것을 본다면 악비가 중국인에게 얼마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인물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비단 중국인 뿐 아니다. 한국 사람도 악비를 충성과 의로움의 상징으로 여긴다. 나 역시 유년시절 악비와 진회(秦檜)의 고사를 듣고 악비를 마음속에서 추모하였다. 그래서 항주에 갔을 때는 일부러 그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하기도 하였다.

'만강홍'은 악비가 여진족 금나라에 의해 자기의 조국 송나라 강토가 유린당한 것을 가슴아파하고 조국광복, 민족광복의 의지를 불태우며 쓴 글이다. 이 글은 "성난 머리카락이 관을 뚫고 위로 솟구친다 (怒髮衝冠)"라는 말로 시작되어 "다시 옛 강토를 되찾아서 승리의 첩보를 임금께 올려야지.(待從 頭 收拾旧山河 朝天阙)"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전편에 걸쳐 침략자 여진족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외침으로부터 조국을 지켜내고자 하는 강한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는 ‘만강홍’은 저명한 중국 문학작품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데 나는 최근 악비의 ‘만강홍’을 읽다가 다음 구절에 이르러 실로 경악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장렬한 뜻을 세워 배고프면 호로의 살점을 반찬으로 먹고 웃으며 담소하다가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음료수로 마시겠노라. (壮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호로의 살점을 반찬으로 먹고 흉노의 선혈을 음료수로 마시겠다"는 악비의 시귀는 비장함을 넘어 소름이 끼친다. 한족을 침략한 여진족과는 더 이상 한 하늘아래 살 수 없다는 그의 분노에 찬 표현은 섬뜩하다.

악비가 살점을 먹고 선혈을 마시겠다고 말한 호로와 흉노는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우리민족의 조상인 동이족들이 아닌가. 우리 한국인은 악비와 같은 한족이 아니라 악비가 그토록 증오하던 동이민족이다. 중국의 한족들이 자기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악비를 민족혼으로 추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몸속에 동이족의 피가 흐르는 우리 한국인이 악비를 추모하면 어떤 꼴이 되는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선혈을 마시고 살점을 먹겠다고 한 악비를 충의지사로 기린다면 이는 조상을 저버리는 배은망덕한 자손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악비의 만강홍을 읽었더라면 그의 무덤 앞에 가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을 것이다.

악비와 같은 강한 민족정신을 가진 인물이 만일 한족이 아닌 몽골족으로 태어나 주원장에 의해 원나라가 짓밟힌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찌했을까. 그는 아마도 한족의 살점을 먹고 한족의 선혈을 마시고 싶어 하지 않았겠는가. 인류에게 민족의 개념이 존재하는 한 누구도 자신의 뿌리인 민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민족에 따라서 역사가 달라지고 역사에 의해서 역사관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원리를 악비의 경우가 잘 보여준다.

한국은 광복이후 친일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는 식민지적 역사관을 지닌 지도층 인사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서글픈 일이다. 저들에게 악비의 '만강홍'을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악비의 ‘만강홍’을 읽으면 한족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민족과 역사관이 왜 중요한지 일제식민사관이 왜 빨리 청산되어야 하는지 그 느낌이 가슴으로부터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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