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창간 7주년 기념 특집기획 ‘정치 70년 비화’
‘이승만 정권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 이승만 대통령의 하와이행
【의회신문=서진모 수석논설위원】본지 창간 7주년 기념 특집기획 '정치 70년 비화' 4.19와 이승만 정권몰락 그리고 최인규 장관의 억울한 사형!

4. 19 혁명과 함께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숱한 역사의 기록을 남긴 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언제나 최고 권력자 밑에서는 최고의 아첨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마키아밸리(Machiavelli) 같은 인물들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밑에는 천하의 권력을 휘두른 경무대 경찰대장 곽영주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라는 별칭을 갖고 장·차관에게도 호통을 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곽영주에 대하여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1945년 해방 후 수도경찰학교를 수료한 전형적인 경찰관이다. 47년 경무대 경비경찰로 들어갔고 48년 경무대 경찰서 경호대 경감으로 승진한다. 타고난 아첨의 수완으로 이승만 대통령 부부에게 잘 보인 그는 얼마 후에 총경이 되었고 경무대 경찰서장이 되고 경호책임자가 되면서 마치 박정희 시대의 차지철 같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인사가 되면서 권력의 해장술에 듬뿍 취한다. 옛말에 해장술에 취한 놈은 지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듯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던 것 같다.

1924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곽영주는 경성직업학교 기계과 2년을 마친 후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한다. 일제시대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일본군에 입대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인이 출세할 수 있는 좁은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일제는 조선 청년들의 출세 욕구를 이용하여 일본군에 지원하도록 유도했다. 일제는 만주 침략 때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 때문에 조선인을 징집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청년들을 지원병 형태로 일본을 위한 전쟁에 이용하기로 하고, 육군 특별지원명령을 공포하여 1938~1943년까지 약 1만 8천 명 가량의 조선 청년들을 일본군에 지원시켰다(태평양전쟁의 막바지인 1944년부터는 지원병 제도가 징병 제도로 바뀐다). 헐벗은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아랑곳없이 단지 자신만의 출세를 위해 일본군에 지원한 자들 가운데 곽영주도 있었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일본의 군대에서 헌병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사실상 당시 조선인 지원병들은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서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일본의 교묘한 술책과 유혹, 그리고 전시하라는 극도의 궁핍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 때문에 일본의 군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지원병 모두가 일제하에서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된 경우가 아닌 이상,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일제의 전쟁에 참여한 것은 이미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

▲ 허정내각
물론 당시 일제에 의해 극도로 억압받던 전시 체제하에서 조선의 청년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주로 일본군의 말단직이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할 엄청난 죄과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영주를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곽영주가 식민지 시대의 반민족적 행위를 넘어서는 엄청난 죄악을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저질렀기 때문이다. 참 기가 막히는 역사스토리이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내각수반(현 국무총리)이었던 허정(許政=울산 출신)에게 국가 경영을 맡기고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대통령권한대행인 허정 내각수반은 최선을 다해 국내 치안을 확보하였고 곧바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그래서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고 윤보선 대통령 시대가 개막 되었지만 얼마 후 5.16 군사혁명으로 최단명 정부가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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