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역사적 전환점을 지나가고 있다

▲김대의 의회신문 발행인

【의회신문】 흔히 우리 민족사를 ‘반만년의 위대한 역사’라고 말한다. 과연 우리 민족의 역사가 빛나고 위대 했는가? 돌아보면 더러는 찬란한 영광의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우리 민족이 지나온 삶의 궤적은 고비마다 남루(襤褸)와 질곡(桎梏)의 연속에 가까웠다.

누가 우리를 남루하게 만들었는가? 남의 탓이 아니다. 인정하기가 대단히 불편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성의 밑바닥에 내재(內在)한 고질적인 분열주의와 분별없는 증오심,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와 잘못을 ‘네 탓’으로만 규정하는 비겁한 책임 회피성향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자(因子)가 어느 사이 이 땅의 풍토병(風土病)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나라 경영을 주도하는 이른바 정치 지도자들의 탐욕과 끼리끼리 만의 계파주의, 금도(襟度) 잃은 패거리 싸움(黨爭)이 더해졌다. 흔히 하는 말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어둡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빈곤한 후진국가군(群)에서 최단기간에 경제⋅문화강국으로 도약한 실로 위대한 기적을 이뤄내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지금 그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정치⋅안보⋅경제⋅외교 등 전방위적으로 가장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어 또 한 번 국제사회의 우려와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난(國難) 수준에 버금가는 심각한 북핵(北核) 도발로 인한 안보 불안에 더하여 안으로는 청년실업과 소득 양극화, 노인 빈곤, 기(氣) 죽은 경재와 창업 부진 등으로 ‘헬 조선(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자조(自嘲)가 회자(膾炙)되고 있는 터에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으로 ‘파면’되어 구치소에 수감, 재판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 헌정사상(憲政史上)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민족 최대의 재앙(災殃)을 예고하며 그칠 줄 모르고 내닫는 북의 핵⋅미사일⋅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도발은 이미 통제 수준을 넘어서고 있으며, 하늘이 무너져도 ‘대화’로는 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지 오래다. 미국과의 관계는 옛날 같지 않고 대일(對日)관계도 최악이다. 중국과의 관계도 절벽을 만났다.

지금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핵⋅미사일⋅화학무기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에 ‘사드 추가배치와 전술핵무기 재배치, 대북 선제타격’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이 미국을 가지고 놀았다. 이제 ‘전략적 인내’는 끝났다”는 것이 새로 취임한 미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관(對北觀)이다.

북한의 도발행태가 계속되면 미국은 더 이상 좌고우면(左顧右眄)하거나 참지 않고, 어느 순간 전광석화처럼 선제타격을 실시해 지구상에서 북한이라는 존재 자체를 아예 설거지해버리거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교체) 또는 김정은 참수작전을 단행해 판을 뒤집어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럴 경우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자위권’과 국제협약인 ‘비핵화’ 그리고 ‘인권’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특유의 저돌성으로 밀어붙이면 중국으로서도 운신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미국과 대척점에 섰다가는 국제금융이나 교역분야에서 중국은 고립을 면할 수 없고, 가까스로 부흥하고 있는 경제가 그야말로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무기체계는 거의 공상과학 수준이다. 미국의 연간 국방예산은 최대 800조원을 약간 밑도는 수준으로, 세계 국방비 순위 2위부터 10위까지인 중국⋅러시아⋅독일⋅프랑스⋅영국 등 9개 군사강국들의 국방비를 다 합친 것과 맞먹는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최고의 인력⋅창의력⋅기술력 등 소프트 파워와 무궁무진한 달러 자본력 등 하드파워의 총합(總合)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첫 미⋅중 외교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린 지난 3월18일 북한은 보란 듯이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 지상분출 시험을 실시했다. 김정은은 실험 성과를 자축하며 ‘3⋅18 혁명’이란 표현을 썼다. 사실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전환할 수 있는 장거리 로켓의 시험발사를 예고한 것이다.

당시 미⋅중 회담에 미국 대표로 중국을 맨 처음 방문한 렉스 틸러슨 신임 미 국무장관은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북핵 해결을 위한 지난 20년간의 노력은 실패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핵무기 개발과 무장을 검토해야 할지 모르는 환경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선언했다.

한국과 일본의 핵무기 개발 보유가 불가피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미 국무장관이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국제사회가 충격을 받을만한 폭탄선언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반도와 동북아는 역사적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는 지점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핵실험 도발에 대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규정하기 시작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부터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인내정책’은 이미 오바마 전 대통령의 집권 말기인 지난해(2016년)부터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북한이 지난해 9월 5차 핵실험 도발을 강행하자 대니얼 러셀 당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공개석상인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이 핵공격을 실행하려고 움직이는 순간 김정은은 그 즉시 죽는다”고 선언했다(2016년 10월12일).

미 국무부 내에서 한반도문제를 포함해 동아태정책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김정은을 겨냥해 ‘그 즉시 죽게 될 것(immediately die)'이라는 극히 비외교적이고 직설적인 초강경 경고를 작심하고 거침없이 한 것은 전에 없던 이례적인 일이었다.

북한의 5차 핵실험 도발 이후 미국에서는 ‘선제타격’과 관련된 언급이 잇따라 봇물을 이루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다수 의원들이 대북 선제타격에 동의하고 있고, 마이크 멀린 전 합참의장과 월터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 등 고위 장성들은 일제히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북 선제타격을 강력 촉구하고 있다.

대북 선제타격은 트럼프 행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여러 대북 옵션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고, 역대 미국 행정부 중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실제로 단행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선제타격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이 반대하고 있는 데다 북한이 어떻든 현재까지는 아직 미국이나 한국을 공격하지는 않은 가운데 엄포만 놓고 있는 시점에서 공격 의도가 분명하고 그 시기가 임박했다고 해서 선제타격을 실행하기에는 많은 부담과 부작용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타격 할 경우 북한의 반격과 한⋅미의 재반격으로 한반도에서 6⋅25전쟁 이후 가장 파괴적인 참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일본과 호주 등 아시아의 미국 우방국들까지 개입하고, 중국이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북한을 음으로 양으로 적극 지원하고 나서면 한반도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은 세기에 걸쳐 온갖 세계문제에 개입해 국제사회의 경찰국가로 역할해오는 동안 과부하에 걸려 있고 미국 국민은 피곤하다. 이제 남의 나라 문제 챙기는 일보다는 미국 내부문제에 충실해야 한다는 민심의 결과가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 제일주의의 복합인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내세운 트럼프의 등장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외교⋅정치인이 아니라 현실주의자이며 거래주의자다.

만에 하나 앞으로 한국에서 일부 세력이나마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개성공단 재개를 주장하는 등 미국의 대북제재에 비협조적이면서 미군 주둔비용 증액에 난색을 표하고 주한미군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반미(反美)로 읽혀질 수 있는 여론이 힘을 얻어 미국의 존재와 개입을 재고하게 만드는 상황이 펼쳐질 경우 ‘무서운 현실주의자’인 트럼프 대통령은 굳이 “싫다”는 한국을 끌어안고 게임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한미 동맹관계는 어떻게 될 것이며, 한국의 안보는 지금처럼 지켜질 것인가? 낙관적으로 봐서 한미관계는 유지되더라도 군사적 동맹관계는 현저하게 후퇴될 것이고, 비관적으로 보면 한미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미국은 일본열도를 방어선으로 하여 중국 대륙과 일본열도를 가르는 ‘애치슨 라인’으로 후퇴하고 한국에서는 손을 떼어 한국은 대륙 쪽으로 방치될 수 있다.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이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능히 할 수 있는 철저한 ‘실익 추구자’이다.

일본이 ‘전쟁 할 수 없는 나라’였을 때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그나마 동맹국인 한국의 역할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이 ‘강한 나라’로 변신했고 미국과의 관계도 더욱 굳건해졌다. 미국으로서는 미국에 노(no)를 연발하는 한국 아니어도 대(對)동북아시아 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한국보다 더 든든한 안전판이 확보된 셈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정책은 만일의 경우 한반도를 불가피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지라도 일본만은 사수한다는 전략이다. 한국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애치슨 라인’은 이 같은 미국의 한반도 전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애치슨 라인은 미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이 지난 1950년 1월12일 전미신문기자협회에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언급됐다.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선을 방위선으로 설정해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는 전략을 골자로 한다.

이 선언으로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되면서 이 지역이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애치슨 선언이 있은 지 약 5개월 후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베트남전쟁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은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오판을 불러일으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일본은 동맹, 한국은 파트너’라는 발언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최우선 동맹으로 여기는 애치슨 식 사고방식의 발로라는 평가가 많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중 정상의 첫 만남인 지난 4월 6~7일의 트럼프-시진핑 회담이 어떤 명시적 언급도 없이 마감된 이면에는 중국의 모종의 언약과 미국의 묵시적 양해가 있었을 여지를 말해주고 있다는 주장이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지나친 기우일 수도 있지만, 강대국 간의 밀약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 한국 같은 약소국의 처지다. 1905년 가쓰라-테프트 밀약이 새삼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국제적 정치판도에서 힘없는 약소국가의 처지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와 역학관계에 따라 휘둘리는 사례는 흔히 있어왔던 일이고, 그런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발생할 수 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해 7월 도쿄(東京)에서 미국과 비밀회담을 갖고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 太郞)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간에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는 데 상호 묵인한다’는 이른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어 그해 9월 미국 뉴햄프셔의 항구 포츠머스에서 가진 러시아와의 회담을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다. 이와 같은 주변강국들의 양해와 묵인을 배경으로 하여 강제 체결된 것이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乙巳勒約, 제2차 한일협약)이다. 대한제국은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주권을 잃은 채 사실상 국망(國亡)을 맞이해야 했다.

지금 북한의 핵 보유가 불러올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치 상황은 우리의 통제를 넘어서고 있다. 북이 끝내 핵을 내려놓지 않고 마지막 한계선을 넘으려 한다면 우리가 원치 않아도 ‘선제타격’을 통한 북핵 제거, 또는 ‘레짐 체인지’로 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칫 이 땅에 참화가 전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내부는 “설마” 하면서 갈가리 찢어져 서로 물어뜯을 궁리만 하고 있고, 정치 지도자들은 미 트럼프 행정부의 한반도 대책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또 어떻게 전개될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대북안보(對北安保)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죽고 사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문제다. 미국은 한국에 이런 문제를 함께 논의할만한 정치 지도자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실로 자괴감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오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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