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행산 주필
【의회신문】정치판이라는 게 본디 그런 것인가? 요즘 여당이나 야당이나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참 어이없다. 당파싸움이 극심했다는 조선왕조시대에는 어땠을까. 문득, 당쟁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내던지고 명산을 주유하며 주옥같은 시문(詩文)을 남긴 조선 중기의 천재적인 풍류시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를 떠올려 본다.

평안평사(平安評事)에 제수되어 임지로 가던 임제는 송도(개성)에 이르러 황진이의 무덤을 찾았다.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린 임제는 거나해져서 시 한수를 읊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는고
잔(盞)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 일이 조정에까지 전해지자 중신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벼슬을 받아 임지로 부임하는 양반 사대부가 천한 일개 기생의 묘를 참배하다니, 반상(班常)의 법도를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임제는 결국 임지에 도착해보지도 못하고 파직되고 말았다. 그는 복직이 되었다가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평양 제일의 명기(名妓) 한우(寒雨)를 찾아간다. 그녀는 지조가 높아 ‘찬비(寒雨)’라는 뜻의 이름 그대로 싸늘하기로 소문난 기생이었다. 취흥이 도도해지자 임제는 붓을 들어 한지에 시 한 수를 썼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寒雨)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자신의 이름 한우(찬비)를 은유해 은근히 수작을 거는 이 기막힌 절창에 기생 한우는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가야금을 끌어당겨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마자시니 녹아 잘까 하노라‘

- 어이하여 얼어 주무시려 합니까, 어찌 언 채로 주무시겠습니까. 원앙 수놓은 베개와 비취 이불이 있는데 왜 얼어 주무시려 합니까. 오늘은 찬비(寒雨)를 맞으셨으니 제가 그대를 품에 안아 언 몸을 녹여드리겠나이다. -

비록 이름은 ‘찬비’이지만 뜨거운 가슴을 지닌 기생 한우의 절절함은 우리의 메마른 숨결을 눈뜨게 하고 강퍅한 심성을 사랑으로 열게 한다. 지난달 26일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기난사에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의 영결식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추도사를 통해 “범인은 희생자 유족이 자기를 용서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라며 “용서는 신의 은총”이라고 했다.

35분 추도사는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에 버금가는 기념비적 연설로 평가받았다. 연설을 끝낸 오바마 대통령은 조용히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총)’를 부르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따라 불렀다. 마침내 6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팔을 들고 찬양하며 눈물을 흘렸다. 슬픔에 잠겨 있던 장례식장은 감동의 장이 됐다. 우리 박근혜 대통령은 분노와 증오를 레이저처럼 쏟아내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용서와 위로와 치유를 노래했다. 누구를 꾸짖거나 하지 않고 ‘놀라운 은총’을 부르면서 용서와 화합을 이끌어낸 것이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의 노예무역상 존 뉴턴이 쓴 찬송가다. 뉴턴은 아프리카에서 사냥한 흑인노예들을 쇠사슬로 묶어 운반하던 중 폭풍우를 만났다. 노예운반선이 전복되어가자 뉴턴은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눈물로 마지막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 놀랍게도 폭풍우는 잠잠해지고 뉴턴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뉴턴은 노예무역을 그만두고 성공회 사제가 되어 자신이 경험한 은총을 찬송가로 썼다. ‘나 같은 죄인도 살리신 그 은총 놀라와.....’로 시작되는 이 노래가 전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사랑과 용서와 화합을 찾아보기 어렵다. 메마른 숨결을 눈뜨게 하는 위로나 치유도 없다. 분노와 증오, 갈등만 있을 뿐이다. 지도자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위압적으로 거칠게 비판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상대를, 또는 국민을 감동시켜 하나로 화합시킬 줄 아는 따뜻한 포용력, 그것이 지도자의 참된 능력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점을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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