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삼촌 김평일을 평양에 불러들인 까닭

▲ 정행산 주필
【의회신문=정행산 주필】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된 후 해외로 추방당하다시피 한 이복동생이자 경쟁자였던 김평일은 무려 23년 동안 북한 땅을 밟지 못한 채 동구 여러 나라의 북한대사로 전전했다. 그런 김평일을 김정은이 갑자기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한민족의 근현대사에서 북한 김일성만큼 운이 좋았던 인물은 흔치 않다. 김일성은 본디 만주(滿洲)의 비적(匪賊) 출신이다. 본명이 김성주(金聖柱)인 그는 일제 강점기 동안 한 때 부랑자 두세 명과 어울려 만주를 떠돌며 재만(在滿) 조선인들을 갈취해 먹고 살았다.

북한정권이 펴낸 각종 출판물에는 북한 김일성이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위대한 항일 독립운동가’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공개된 각종 비밀문서와 중국 동북(만주)지역 항일운동사에 관한 중국·일본의 많은 자료에는 북한 김일성이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비적생활로 먹고 살던 김일성은 그 일도 여의치 않자 중국공산당 산하 중국 민간유격대인 ‘동북항일연군’에 말단대원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의 ‘비적 토벌’이 강화되면서 ‘동북항일연군’은 각지에서 와해되고 생존대원들은 일본 군경에 쫓겨 국경 너머 소련 연해주로 뿔뿔이 도망쳤다. 북한의 김성주(김일성)도 아내 김정숙과 함께 1940년 11월 초 소련 령 연해주로 도망친다.

연해주의 소련 극동군사령부는 이들 동북항일연군 패잔병들을 끌어모아 ‘88임시정찰여단‘이라는 척후부대를 만들고, 이들 가운데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자들은 소련군 임시장교로 임관했다. 만주 길림(吉林)에서 육문중학(毓文中學)을 2학년까지 다닌 김성주도 임시대위로 임관되었다.

이 ‘88임시정찰여단’ 생활이 김성주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됐다. 소련 극동군사령부의 지휘부는 고분고분하고 종파성도 없는 김성주를 장차 북한의 소련 하수인으로 내정하고 스탈린에게 추천을 한 것이다. 김성주로서는 그야말로 팔자가 바뀐 기막힌 행운이요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총 한 방 쏴보지도 못하고 억류돼 있다가 해방을 맞은 김성주는 평양 입성 소련군에 의해 ‘위대한 독립투쟁가 김일성 장군’으로 변신,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그 절대권력은 아들과 손자로 세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일성의 후계자는 당초 김정일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북한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자 김성애라는 빼어난 미모의 비서와 불륜관계에 빠져 그녀에게서 딸 경진과 아들 평일?영일을 낳았다. 김평일(1954년 생)은 이복형인 김정일(1942년 생)보다 모든 면에서 나아 김일성에 의해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정일은 ‘빨치산 원로’들의 지지로 김평일을 밀어내고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 김정일이 권력을 잡은 후 해외로 추방당하다시피 한 김평일은 무려 23년 동안 북한 땅을 밟지 못 채 동구 여러 나라의 북한대사로 숨 죽여 살아야 했다. 그런 김평일을 김정은이 최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해외주재 외화벌이 일꾼들의 ‘정신 재무장’을 위해 ‘43차 해외 공관장회의’라는 것을 소집하면서 삼촌 김평일의 귀국을 명한 것이다.

왕조체제는 왕가(王家)의 후광과 강력한 지지가 필수적이다. 이른바 ‘백두혈통’의 유일한 본류였던 김경희는 남편 장성택이 처형되자 조카 김정은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고, 북한 핵심층은 납작 엎드린 채 눈알을 굴리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강력한 후원자를 잃고 세습 명분까지 흔들리는 김정은은 ‘백두혈통’인 삼촌 김평일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안정시키려는 계산이거나, 아니면 기왕 내친 김에 위험요소를 아예 설거지해버리려는 속셈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쨌거나 머리 나쁜 어린 아이 김정은이 또다시 ‘인민’과 동포들을 창피하게 만드는 황당한 사고를 더 이상 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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