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행산 주필
【의회신문=정행산 주필】남과 북은 지난 7일과 8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을 갖고 오는 10월20일부터 26일까지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 각각 100명이 상봉하기로 합의했다.

가족과의 생이별은 사람의 고통 가운데에서도 가장 끔찍한 고통 가운데 하나다. 6⋅25 동란으로 인해 그런 고통 속에 살아온 우리 국민이 1백23만여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지난 2000년 1차 상봉 이후 지금까지 19차례의 상봉행사를 통해 북의 가족을 만난 사람은 1만2천여 명에 불과하다. 전체 1세대 실향민의 1%, 정부에 상봉을 신청한 12만여 명의 10% 정도다.

이 12만여 명 중에서도 지난 몇 년간 6만여 명이 한(恨)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남은 사람도 절반이 80세 이상 고령(高齡)이다. 얼마 후면 1세대 실향민 모두가 가족을 가슴에 묻고 세상을 뜰 수밖에 없다.

이 땅에는 6⋅25 동란으로 인한 이산가족 말고도 또 다른 새로운 이산가족이 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또는 사람다운 삶을 위해 가족과 고향을 떠나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찾아온 3만 명에 가까운 탈북 동포들이 그들이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또 이번 이산가족 상봉 소식을 접하면서 이들은 떠나온 북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사무칠 것이다.

명절이면 가족이 있는 북녘 고향을 향해 상을 차려놓고 빈 절을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우는 전혀 다르지만 문득 옛 고사(古史) 한 대목을 떠올렸다. 성산 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북비고택(北扉古宅)이 있다. 북비(北扉)란 ‘북쪽으로 난 사립문’이라는 뜻이다.

조선 영조(英祖) 때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게 되자 세자의 호위무관이던 이석문(李碩文)은 목숨을 내어놓고 임금인 영조에게 그 부당함을 간(諫)했다. 이 일로 이석문은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한 후 낙향을 하게 된다.

고향으로 내려온 이석문은 집을 지었는데,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북쪽을 향해 사립문을 내어 열어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북향재배하며 평생을 사도세자를 그리고 애도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집을 ‘북비고택(北扉古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얼마 후 영조가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하고 이석문에게 벼슬을 내려 출사를 권유했으나 이석문은 “사람이 뜻을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구차하게 꺾인다면 무엇이 그 사람에게 귀하겠습니까? 차라리 초야에 묻혀 유유자적하겠습니다.”라며 끝내 벼슬을 사양했다고 한다.

훗날 이석문의 손자 이규진(李奎鎭)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正祖)가 그를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너희 집에 지금도 북비(北扉)가 있느냐?”고 물으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충절로 모셨던 신하 집안의 안부를 간곡하게 물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석문의 절의를 기려 그를 병조판서에 추증(追贈)했다.

탈북자들의 북녘 고향과 굶주리고 있을 가족을 그리는 안타까운 마음이 어찌 모시던 주군(主君)을 향한 마음보다 덜 할 수 있을 것인가. 분단의 비극이 새삼 가슴에 아프게 와 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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